진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혼자가 되었다. 엄마는 진이 어릴 때 이혼을 하고 혼자서 진을 키우고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말수가 적고 조용했던 진은 더욱더 입을 닫아버리게 되었다. 진은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낮과 밤이 흘러가던 중 진은 문득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은 엄마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영원한 외로움 속에 스스로를 던져 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세상과 단절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진은 무심히 왼쪽 손목을 그었다. 마침 혼자 사는 손녀가 걱정돼서 시골에서 올라온 외할아버지에게 발견되면서 목숨을 건졌다. 두 번째 운명의 장난은 또다시 진을 교묘히 비껴갔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로 진은 이모네 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집을 오래 비워야 할 때면 진을 이모한테 맡기곤 했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모가 죽은 언니 대신 진의 엄마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이모는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이모부와 둘만의 결혼을 감행했던 이모였다. 이모부는 고아였고 경제적인 능력도 별로 없었지만 마음씨가 따뜻하고 가정적인 남자였다.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이 시기할 만큼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고 이모의 얼굴은 늘 보름달처럼 환하고 막 쪄놓은 씨감자처럼 뽀얬다. 그러나 이모부에게 십 년이 넘게 숨겨 놓은 여자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모는 그만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팔자 좋은 여자라고 모두의 부러움을 받던 이모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우울증 환자로 전락했다.
이모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밥을 차렸고 빨래가 쌓이면 세탁기를 돌렸고 이따금 집안 청소를 하기도 했다. 그 외의 시간엔 하염없이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위자료로 받은 돈과 외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에 이모의 삶은 유지되고 있었다. 진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모를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진마저 없다면 이모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죽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진 역시 쉽게 집을 나갈 수는 없었다. 이모의 존재는 미약하게나마 진을 세상에 묶어 두는 끈이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다른 친척들을 만날 일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진에게 이제 가족이라곤 이모 하나뿐이었다. 진은 이모를 보살피고 이모는 진의 곁을 지키며 차츰 서로의 외로움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이모는 이모부의 사랑이 거짓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지독한 허무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 허무는 이모의 존재를 서서히 소멸시키는 듯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아지고 작아져 결국엔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릴 때까지도 이모는 허무를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진이 보기에 이모는 여전히 이모부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이 한낱 허상일 뿐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허무 속에 자기 삶을 그렇게 내동댕이쳐 버리지는 못할 테니까. 한편으로 진은 그런 이모의 열정과 순수가 부럽기도 했다. 이모는 사랑에 빠질 때에도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에도 모든 것을 걸고 투신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진은 사랑도 삶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먼발치에서 부정하고 회피하는 겁쟁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 날, 진은 아침부터 훈을 기다렸다. 소설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이 궁금하기도 했고 이젠 매일 보던 훈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허전해서 못 견딜 것만 같았다. 오후 다섯 시. 시간은 느리게 가고 하루는 멀게만 느껴졌다. 진은 오후 네 시부터 도서관 문이 열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문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는 정확히 오후 다섯 시가 되자 도서관 문을 열고 나타났다. 한 손엔 어제 빌려간 소설을 들고 성큼성큼 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하루 종일 햇빛을 보지 않고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여름인데도 얼굴뿐만 아니라 팔까지 밀가루라도 발라 놓은 듯 희고 말갰다. 하얀색 무늬 없는 티에 구김이 살짝 간 청바지를 받쳐 입은 차림으로 보아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회사원도 아닌 것 같았다. 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훈에게 물었다.
출처 무아
“소설은 어떠셨어요?”
“말씀하신 대로 전혀 다른 소설처럼 느껴졌어요. 소설도 한 편의 이야기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누구 입으로 전해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듯 소설도 그렇지요. 제가 처음에 읽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께서 비슷한 소설을 하나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훈에게 K작가의 소설을 추천해 줬다. 이미 진의 머릿속에는 그가 읽어 봤으면 하는 소설의 제목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말해 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던 참이었다. 그런데 훈이 먼저 물어봐 주니 진은 들뜨고 설렌 마음으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훈은 진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면서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더니 진이 추천해 준 소설을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빌려 갔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그에게도 함께 사는 사람이 있을까? 매일 책 한 권씩을 읽는 사람이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많다는 게 아닐까? 그도 나처럼 책 속에 파묻혀 외로움의 시간 속으로 숨어 버린 사람은 아닐까?’
훈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이모는 퇴근할 때 술을 사다 달라며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진이 이모에게 오늘만 참아 보라고 하자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바닥을 긁는 듯한 격하고 거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충혈된 시뻘건 눈, 뒤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머리칼이 진의 눈앞을 마구 어지럽혔다. 이모는 요즘 병원에 다니다 말다 하면서 상태가 호전되다가 다시 악화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진은 이모의 알코올 섭취를 조금이라도 줄여 볼 심산으로 냉장고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도 일부러 술을 사다 놓지 않았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결국 진이 퇴근길에 술을 사가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이모는 순하게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