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의 행복 1

외로움의 상처들

by 소위 김하진

진은 도서관 데스크에 앉아 진한 잉크 냄새와 책 읽는 사람들의 온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자그마한 소음 속에서 평온을 느꼈다.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를 손으로 끌어내리다 무릎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흉터에 스치듯 손이 닿았다. 순간 진은 흉터를 손으로 살살 쓸어보았다. 상처가 덧나면서 살이 변형되어서 원래의 피부를 잃고 타일처럼 매끄럽고 투명해졌다. 이제는 아무런 아픔도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흉터일 뿐이지만 손길이 닿을 때면 외로움의 상처들이 하나하나 상기되곤 했다. 첫 번째 외로움의 상처는 언제였던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느 날 일이다.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진은 친구도 없고 늘 혼자였다. 부끄럼 많고 소심한 성격 탓에 아이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골목길을 내려다보는 것이 심심함을 달래는 전부였다. 그날, 낯선 여자아이 하나가 담벼락 밑으로 다가왔다. 햇살에 눈이 부셨던가. 진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아이는 그런 진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같이 놀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은 황급히 옥상에서 뛰어내려 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던 거 같다. 낡은 집은 땅 모양도 네모가 아니었고 계단도 네모가 아니었다. 찌그러지고 들쭉날쭉한 모양의 계단들이 높이도 제각각인 상태로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평소에도 오르고 내릴 때면 난간을 꽉 쥐어야 하는 그곳을 진은 무엇에 쓰인 듯 한달음에 뛰어내려 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두 계단을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진의 몸은 이미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세상은 정지했다.

‘아, 저 아이가 나를 기다릴 텐데……. 어쩌지?’

그리고 두 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면서 계속해서 아래층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면서도 세상은 다시 멈추었다.

‘내가 안 나가면 함께 놀자는 걸 거절한 것으로 오해할 텐데…….’

진은 온몸이 바닥으로 직행하기 직전 계단 앞에 있던 기다란 봉 하나를 기적적으로 잡아챘다. 그 구조물이 거기 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봉이 없었다면 지금의 진은 몸의 어디 하나쯤은 못 쓰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에 들이닥칠 뻔했던 짓궂은 운명의 장난은 그 순간 교묘히 진을 비껴갔다. 높은 곳에서부터 가속이 붙어 내려오던 진은 봉에 붙들려 정신없이 빙글뱅글 돌았다.

‘아, 이 동네에서의 첫 친구가 저기서 기다리는데……. 어쩌지?’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진은 그만 손을 놓아 버렸고, 순간 몸은 하늘로 붕 날아갔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오른쪽 무릎이 수돗가에 있던 고무 대야에 그대로 내리 꽂혔다. 온몸이 감전된 듯한 고통 속에서도 진은 생각했다.

‘아, 저 아이가 기다리다가 가버릴 텐데…….’

피가 흘렀다. 다친 곳이 아픈 건지 친구를 이렇게 아깝게 놓치게 된 것이 슬픈 건지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방 안으로 들어와 다친 무릎을 쳐다보았다.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다. 그냥 한동안 혼자서 계속 울기만 했다. 그 다리는 오랫동안 진을 힘들게 했다. 낫지를 않아서 상처가 짓무르고 덧나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 상처는 짙은 흉터가 되어 진의 무릎에 남았다.

‘홀로 빈 집을 지키는 아이’ 이 이미지는 유년 시절부터 사춘기까지를 관통하는 진의 자화상이었다. 기형도의 ‘엄마 생각’ 안에 있는 아이처럼 언제나 ‘찬밥처럼 방에 담겨’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진의 일상이었다. 외로움은 상처가 되어 문신처럼 진의 몸 한곳에 새겨지고 말았다. 썩 괜찮게 살고 있음을 자위하는 날에도 무릎의 상처를 만지면 그때의 진물이 다시금 살을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출처 무아


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도서관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책을 대출해 주고 반납해 주는 업무를 하면서 하루 종일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진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왔다. 하루에 딱 한 권의 책만 빌려가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 책을 반납한 후 다른 책 한 권을 다시 빌려갔다. 도서관이 휴관하는 월요일만 빼고 그는 정해진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빌리러 왔다. 그의 독특한 루틴을 알게 된 후로 진은 그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빌리고 반납할 때 먼저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박 훈.’ 그러고 나서 남몰래 그의 대출 이력도 살펴보았다. 한 장르를 집중적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취향은 파악할 수 있었다. 시나 소설, 에세이, 산문집 등 주로 문학적인 책들을 빌려 읽고 있었다. 즐겨 읽는 소설의 작가가 진과 겹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땐, 설레고 기분이 좋아서 괜히 혼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유독 아무런 무늬도 그림도 없는 하얀 티를 즐겨 입었다. 진 역시 새하얀 블라우스를 자주 입는 편이었다. 진은 독서 취향뿐만 아니라 패션 취향까지 비슷한 훈이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은 훈에게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매일 그가 오는 시간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설레었지만 선뜻 다가설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하루는 훈이 그간의 루틴에서 살짝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 예전에 빌려갔던 책을 다시 빌린 것이다. 한 번 빌린 책은 결코 다시 빌려가는 법이 없던 그였다. 진은 그가 혹시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깜빡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순간 마음속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건 이미 읽었던 책인데…….”

“네?”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늘 새로운 책만 빌리시던 분이 갑자기 이미 빌렸던 책을 빌리셔서요. 순간 저도 모르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떤 책을 빌려갔는지까지 기억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이미 읽은 소설이에요. 보통 소설을 읽으면 한 인물에게 자신을 이입하게 되잖아요? 근데 이 소설은 이상해요. 읽고 나서 한참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다른 인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빙빙 맴돌더라고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요. 그 소설도 서로 다른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아,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두 번, 세 번 다른 인물이 되어 읽어 봤는데 정말로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게 보이고 느껴지더라고요.”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동지를 만나니 좋네요.”

훈은 환한 미소를 짓더니 책을 들고 구석진 자리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진은 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다가서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과 누군가에게 미친 듯 달려가 보고 싶다는 욕망이 똑같은 강도로 가슴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왔다. 순간 진은 자기도 모르게 왼쪽 손목으로 손이 갔다. 커다란 손목시계 밑으로 울퉁불퉁하게 제대로 아물지 않은 흉터가 만져졌다. 이것은 진의 두 번째 외로움의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