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의 악몽

시시포스의 형벌

by 소위 김하진


지 독 한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뜬다. 등짝이 땀에 젖어 흥건하다. 꿈속에서 끝도 없이 울었나 보다. 어찌나 울었는지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프다. 머리도 지끈지끈하다. 고통이 거대한 덩어리로 엄습하면서 어둠과 함께 온몸을 짓누른다.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가만히 눈을 다시 감는다. 눈가에 남아있던 눈물 몇 줄기가 마저 흐른다.


모든 게 되돌아가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울기만 하던 어리고 무기력한 때로...

아버지는 젊은 얼굴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왜 그랬을까. 오래 잊고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난다. 기억들이 벌레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다닌다. 오소소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떨린다. 한참을 심호흡하다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가만히 어둠을 응시한다. 눈앞에 보이는 여기로 천천히 나를 옮겨 온다.


'이곳에 내가 있다.'


K는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해한 사람이었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기억을 잊었는지 조작했는지 외면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든 저렇든 마음속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K의 악몽에는 패턴이 있다. 몇 가지 패턴이 교대로 등장하는데 배경도 사람도 달라진 듯하지만 결국은 같은 내용의 무한 반복이다. 매번 유사한 공간에서 유사한 일을 다시 겪는다. '이건 꿈이네'라며 안도할 수 있는 일말의 단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지독히 사실적이기까지 하다. 현실보다 생생하게 와닿는 감정으로 괴로워하다 몸서리치며 깨어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K에게 무해하다던 아버지는 그렇게 꿈속에서만은 여전히 유해하다.


시시포스는 산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간 바위는 사정없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린다. 그럼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는 영원히 바위를 굴려 밀어 올려야만 한다. 이 신화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형벌 같은 운명을 상징한다. K의 악몽도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악몽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은 커다란 미로 같은 건물이다. K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어딘가 갈 곳이 분명히 있는데 정확히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건물 하나뿐인 공간에서 밤새도록 헤매 다니기만 한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목적지는 나오지 않는다. 시간은 이미 늦었고 마음은 다급하고 초조하다. 가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답답함이 마침내 공포감으로 치닫는 순간 K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악몽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아버지이다. 그의 눈은 토끼처럼 빨갛고 공허하다. K를 보고 있어도 K 너머의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은 초점이 맞지 않아 혼탁하다. 그는 끊임없이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칠게 격분해 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경멸하듯 그와 K를 쳐다본다. K는 부끄럽고 무참해진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참다못한 K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가슴팍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순간 K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K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아버지가 일본에 강제징용된 이후 태어난 유복자였다. 한 마디로 '아비 없는 자식'이었다. 1940~50년대 격변과 혼돈의 시기에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먹지도 입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제멋대로 자라난 그는 소위 날건달이 되었다. 그래도 순진한 시골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K였다. K의 기억 속 아버지는 주사가 심한 난봉꾼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했다. 아침이면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일터로 나갔고 저녁이면 더러워진 작업복으로 되돌아와 술을 마시다 잠들었다. 집에서 그는 제정신이기를 거부했다. 그런 그를 K 역시 거부했다.


어제의 꿈도 결국 미로와 아버지이다.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 뜬금없이 등장하거나 평생 동안 가보지 못했던 낯선 장소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두 모티브가 다양하게 변용될 뿐이다. 오후쯤 되면 고통도 기억도 차츰 가물가물해진다. 가슴은 여전히 뻐근하고 저리지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되살아 나는 장면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K는 오늘도 낡은 사진첩을 덮어버리듯 꿈을 덮는다. 단단히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 버린다. 현실의 K는 그렇게 꿈속의 K에게 절대 손 내밀어주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곳에 내가 있다.'


K는 혼자 중얼거리며 식은땀을 닦는다.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