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에 시달린 K는 쓰디쓴 입안을 물로 한 번 헹구고는 출근 준비를 한다. 오늘은 작가와 미팅이 있는 날이다. P 작가는 여자와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그를 만나는 날은 술 접대에 혼을 갈아 넣어야 하는 날이다. 출판사 사장은 부한 얼굴로 앉아 있는 K를 늘 못마땅해했다. 어제도 퇴근 전 K를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했다.
"K 씨, 우리 출판사에 K 씨 만한 인재가 어디 있나? 번번이 공모전에 낙방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쓰는 작가 아냐. 근데 말이야. 유명 작가의 편집자가 되는 것도 작가 못지않게 대단한 일이라고. 암 그렇고말고. 내일 P 작가 만나면 다음 책은 꼭 우리 출판사에 맡겨달라고 부탁해 봐요. 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아보라고. 책 한 권만 대박 내 봐. 내가 K를 편집장에 앉혀 주지. 허허허. 암 그러고말고."
사장에게 대거리 한마디 못하고 돌아 나왔다.
K는 아침부터 입안만 바짝바짝 마른다.
'출근을 하지 말아 버릴까. 아프다고 할까. 어차피 미뤄봐야 내일이나 모레다.'
머릿속에서 미로와 토끼 눈들이 빙빙 돌아가며 어지럽힌다.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K는 널어놓은 오징어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걸음을 내딛는다. 매서운 빌딩풍을 맞으며 작은 2층 건물 앞에 도착한다. 사장에 편집자 3, 디자이너 2, 영업직 1, 회계직 1의 소규모 출판사다. 요즘 들어 부쩍 매출이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속이 타들어가는 영업 차장은 신간과 함께 나갈 출판사 홍보 글에 유난히 열을 올렸다. K의 글이 맘에 안 든다면서 면전에서 비난을 퍼부었는데 아마도 판매 실적이 저조해 예민해진 듯했다. 그날 K는 영업 차장에게 무시를 당하고 모멸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어떤 작가들은 덩어리만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기도 한다. 덩어리를 쪼개고 다지고 다듬는 건 모두가 편집자의 몫이다. 대단한 필력의 작가와 작업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K 손에 들어오는 원고들은 하나같이 날것 그대로의 핏덩어리들이었다. 그렇고 그런 글도 명문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적의 편집자는 못 되어도 간난의 탈고 끝에 책이 되어 나올 때까지의 애착은 작가 못지않을 것이며 잘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고사를 지내도 부족할 판이다. 소개 글과 홍보 기사가 잘 나가야 누군가의 눈에라도 띌 것이니 편집을 할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한다.
'영업 나부랭이가 책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어미 앞에서 네 자식 내가 더 안다고 으스대는 격이 아니고 뭐래'
속으로 욕할 뿐 면전에서는 말 한마디를 못했다.
꼴 보기 싫은 영업 차장을 피해 소리도 안 나는 잰걸음으로 곧장 2층으로 올라간다. 오늘은 오전 업무만 마치고 미팅을 핑계 삼아 회사를 일찍 나설 참이다. P 작가를 만나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다. 출판사와 원룸의 중간 지점에 K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밤샘 작업을 하고 퇴근하던 날이었다. 모두가 출근하는 아침에 퀭한 눈으로 지하철에 몸을 실은 K는 졸음이 밀려오던 즈음 느닷없이 몸을 일으켜 지하철 밖으로 튀어 내렸다. 있는 힘껏 눌러놓았던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단숨에 지상으로 나온 K는 몽유병 환자처럼 목적 없이 길을 걸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설 즈음 조그만 카페 하나가 보였는데 순간 미치도록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커피. 숨을 쉴 수 있으려면 필요한 건 진한 커피 한 잔이었다. 그날 이후로 역 앞 모퉁이 카페는 K가 숨이 모자랄 때마다 은밀히 들르는 비밀 장소가 되었다. 카페 이름도 기가 막히게 '숨'
1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있는 벤치 의자에 앉으면 한쪽 몸을 벽에 기댈 수 있다. K는 엄마의 자궁 같은 좁고 구석진 그 자리를 좋아한다. 그 자리에 앉아 라테를 홀짝거리며 문 쪽을 바라본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오는 손님이 하나도 없다. 처음 입술에 닿는 우유 거품의 간지러운 부서짐, 거품 사이를 뚫고 나오는 쌉싸래한 커피 줄기의 맛, 목 넘김 후에 입안 가득 감싸는 고소한 탄내. 라테가 주는 향락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흐른다. 모퉁이 카페의 주인은 K와 비슷한 또래일 듯하나 특유의 무표정으로 나이보다 네댓 살은 더 들어 보인다. 부한 K와 뚱한 바리스타가 한 공간에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다. 시계를 보니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 P 작가는 참을성이 없다. 찻잔을 가져다주고 돌아 나오는데 무표정한 그가 말을 건넨다.
"저기 손님, 이 쿠폰 가져가세요. 제가 카운팅 해 보니 10잔을 드셨어요. 다음번엔 한 잔 무료로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데스크에는 많은 사람들의 쿠폰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K는 쿠폰을 얼떨결에 받아 들고 아무 말 없이 카페를 나온다. 당황하고 설렌 나머지 할 말을 놓쳤다.
'열 잔이라고? 그렇게나 많이 갔었나. 근데 그걸 세고 있었다고?'
쿠폰 상단에는 K의 이름 대신 '오후의 라테'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