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를 나서자마자 쿠폰을 지갑에 구겨 넣고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머릿속은 이미 P작가와의 약속 장소에 가 있다. 지난번 미팅에서 만취한 P작가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렀다. 오늘만큼은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 만남을 종료하리라 다짐한다.
P작가가 좋아하는 곳은 무한 리필 참치횟집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기름기 가득한 참치회를 끝도 없이 입안에 집어넣으며 길고도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휴...'
심호흡을 하고 입꼬리를 위로 올린 후 가게 문을 연다.
기다렸다는 듯 P작가가 온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K 씨, 우리 얼마만이야. 두 달은 지나지 않았나? 그 사이 더 아름다워졌구먼. 애인이라도 생긴 거야?"
"네, 작가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죠?"
바 테이블을 선호하는 P작가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맡아 둔다. 치마를 최대한 쓸어내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는다. 앉기가 무섭게 술 먼저 따르는 P.
"저는 요즘 약을 먹고 있어서요. 술은 많이 못 마실 거 같아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P는 이미 K가 오기도 전부터 소주 한 병을 비운 상태이다. 늘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와서 술에 취한 상태로 상대를 맞이하는 게 P의 습관이다. 온전히 제정신인 P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P의 눈과 마주친다. 순간 K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초점이 흐린 빨간 눈이다. 악몽 속의 벌겋게 충혈된 눈과 하나로 겹친다.
"작가님, 요즘 구상 중인 작품이 있다고 들었어요. 잘 되고 계신가요?"
"나? 허허허허.... 늘 구상이야 하지. 근데 영감이 떠오르질 않아. 요즘... 나이 들수록 영감을 주는 대상이 있어야 글이 잘 써지더라고. 어때, K가 나의 뮤즈가 되어줄 텐가? 하하하하..."
지난번 작품 때도 그랬다. P와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K는 밤을 새워 술을 접대했고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맞장구치며 들어주었다. 하지만 계약은 K의 출판사보다 이름 있는 곳을 선택했다. 이곳 역시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영세한 출판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내어 주는 유명 작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또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돈이 되는 대어를 놓칠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P를 포기하지 못하는 출판사 사장의 집착 때문에 K는 매번 매달리다시피 P에게 작품을 구걸해 왔다.
'이 늙은 여우는 지금도 다른 꿍꿍이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K 씨, 두고 온 애인 생각하나? 왜 우리 만남에 집중을 못하고 그래? 정말 애인이라도 생긴 거야? 그래?"
"아니에요, 어젯밤 잠을 못 자서 조금 피곤한가 봐요. 제가 얼마나 작가님을 뵙고 싶었는데요 "
입가에 억지 미소를 흘리며 술을 한 잔 더 따른다.
"작가님, 이번 작품은 꼭 우리에게 기회를 주세요. 제가 작가님 작품에 최선을 다할게요. 후회하지 않으실 만큼 열심히 해 볼게요!"
"그럼 우리 K 씨 능력이야 내가 믿지. 그런데 요즘 영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야. 작품이 써져야 출간도 할 거 아닌가. 허허허허."
출처 Pixabay
P는 작가이면서 대학교 교수이다. 이 늙은 여우는 새파란 여대생들을 뮤즈랍시고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고 이미 출판업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다. 순진한 여대생들이 그루밍을 당하는 사이 P는 정말로 영감을 얻었는지 어쨌는지 소설이 문학상을 받았고, 산문집도 대박이 났다. K에게도 몇 번의 수작을 걸었으나 어린 여대생들처럼 순진하게 넘어갈 갈 K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번 만남에서는 위험했다. 과음으로 자칫 정신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고받는 술잔이 위태롭게 쌓이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의 술병들이 눈앞에서 거칠게 흔들린다.
꿈인가 생시인가. P가 원고뭉치 하나를 꺼내서 보여준 것 같다. K는 그걸 읽고 주인공에 대해 비판했다. 여 주인공이 너무 답답하고 구시대적인 인물 아니냐고 했던가. 신파적인 요소는 있어도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내용 같다고 말한 것도 같다. P는 껄껄 웃다가 갑자기 작품 볼 줄 모른다며 신경질을 내기도 하고 그렇게 둘은 흥분한 상태로 한참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다음 K의 기억은 끊겼다.
눈을 떠 보니 낯선 사무실, K의 몸에 담요가 덮여 있다. 소스라치게 놀란 K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사무실 안은 캄캄하고 바로 옆쪽으로 스탠드 불빛이 눈부시게 새어 나온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P가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K는 놀란 눈을 부릅떠 다시 쳐다본다. P와 눈이 마주친다. 초점이 흐린 빨간 눈이다. K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이곳에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