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고른다. 그리고 이내 몸을 일으켜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P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채듯 등 뒤에서 덮쳐온다. K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한다. 긴 복도의 끝까지 숨 한번 쉬지 않고 달리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 난간을 손에 쥐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여기는 악몽에서 보던 곳이다.'
K는 허둥대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계단은 나가는 문으로 곧장 연결되어 있지 않다. 복도를 계속해서 헤매고 다닌다. 꽉 닫힌 문, 문, 문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K는 악몽에서와 똑같이 건물 안 미로에 갇혀버렸다.
'이건 꿈이 아니야. 그러니까 출구는 반드시 있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K는 복도 반대편 끝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들었다 없어졌다 하는 걸 발견한다. 온몸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달려본다. 드디어 출구다.
건물 밖으로 나온 K는 또다시 미로 속이다. 꿈속에서도 건물 안에서만 헤맸던 것은 아니다. 알 수 없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속에서 방향을 잃고 같은 자리를 하염없이 뱅글뱅글 맴돌곤 했었다. K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가늠해 본다. 아직도 날은 캄캄하다.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어둠에 하얀빛 물이 연하게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새벽녘일 것이다.
'이 교정만 빠져나가면 첫차를 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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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중년의 여자 한 명이 보인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뜯어 빗고 축축하게 몸에 들러붙은 블라우스를 치마 속에 욱여넣으며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여자가 오는 반대 방향을 향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걷는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조심 그러나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렇게 교정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길을 이정표 삼아 K는 한참만에 대학교를 빠져나온다. 사위가 한층 더 밝아졌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24시간 내내 쉼이 없는 이 도시는 거리를 물들이는 사람들이 점이었다가 선이었다가 면이었다가를 무한 반복할 뿐이다. 도시의 거리는 단 한 번도 無인 적이 없다. 이제는 점들이 모여 서서히 선이 되어갈 시간이다. 드디어 지하철 역 앞에 도착한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은 K는 한 발 한 발 간신히 마침표를 찍듯 계단을 내려간다.
'이럴 수가, 가방도 휴대폰도 없다.'
온몸을 뒤지니 치마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어제 약속장소에 가기 전 올 풀린 스타킹을 발견하고 급히 사서 갈아 신었는데, 그때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모양이었다.
'이 돈이면 지하철은 탈 수 있겠다. 근데 어디로 가지?'
맨 처음 역에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첫 차라 비어 있는 자리가 꽤 많다. 지독하게 고단한 날에는 일부러 종점으로 가서 첫차를 타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약간의 번거로움을 견디면 긴 시간 자리에 앉아 부족한 잠을 보충하며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야 할 방향에서 더 먼 곳까지 뒤돌아가 지하철을 타는 건 K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 도시의 사람들은 늘 잠이 부족했고 다리가 아팠고 지쳐 있었다.
깜빡 졸음이 밀려왔을까. 지하철 안내방송의 낯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용수철처럼 지하철 밖으로 튕겨 나간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내리고 보니 자주 가던 카페 '숨'이 있는 역이다.
'아, 이 역이구나.'
이런 이른 시간에 카페 문을 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K의 발길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다. 아직 점이 선이 되지 않은 한적함이 있는 뒷골목을 K는 쉼표처럼 천천히 걷다 멈추다를 반복한다. 카페 문은 단단히 닫혀 있다. 이제 남은 돈으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카페 문 앞에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내처 눈을 감아버린다. 그렇게 K는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정신을 잃는다.
따스한 햇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옴을 느낄 때쯤 목소리 하나가 희미하게 K의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저기요?"
K는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뜬다. 그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K를 바라보고 서 있다. 그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앞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K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어느새 아침인 건가.'
"안녕하세요? 커피를 마시려고요. 제가 너무 일찍 왔죠."
"아... 네.... 아직 오픈 시간은 안 되었어요. 제가 가게에 정리할 게 있어서 조금 일찍 나왔거든요. 원하신다면 커피는 내려드릴 수 있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K는 카페 문을 여는 그의 뒤 편에 서서 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고 삐져나온 블라우스를 치마에 집어넣고 기어 올라간 치맛단을 쓸어내린다. 아무리 매무새를 가다듬어도 흉측한 몰골이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K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늘 앉던 자리로 직행한다. 구석진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무거운 머리를 벽에 기댄다.
"늘 드시던 거 드릴게요. 빈 속이실 테니 조금 연하게 내려 드릴게요."
"네, 알아서 해 주세요. 참, 제가 실은 지갑을 잃어버렸거든요. 다음번에 드려도 될까요 커피값은?"
"손님, 어제 제가 쿠폰 드렸잖아요. 오늘은 무료로 드시는 날입니다."
그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간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주체할 수 없는 노곤함에 취해 K는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