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라테 위로 벚꽃이

미주와 연우

by 소위 김하진

K는 출판사 사장의 호통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여느 때처럼 사장에게 시달리는 꿈을 꾸었나 보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시계는 정오를 막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다. 멍한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아버리자 이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카페 안은 텅 비어 있고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곤 K 혼자뿐이다. 카페의 출입문을 보니 안쪽으로 OPEN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보인다.

'바깥쪽은 CLOSED일 테니 카페 문을 닫았단 말인가? 이 시간에? 바리스타는 대체 어디 간 거지?'


테이블을 보니 라테 한 잔이 정물화처럼 얌전하게 놓여 있다. 라테 위의 나뭇잎 그림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다. K는 커피잔을 조심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본다.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다.

'몇 시간은 잔 것 같은데 아직도 식지 않았네.'

의아해하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음미하며 마신다. 어젯밤의 과음과 긴 공복으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찌릿찌릿 위가 아려온다. 카페 안에는 익숙한 재즈 선율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귓속을 간지럽히듯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K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뱉는다.

'이제야 숨이 쉬어지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더니 그가 나타난다.

"손님, 이제 일어나셨네요?"

"아, 네! 제가 여기서 잠들어 버렸네요. 죄송해요. 근데 카페 문은 왜 안 여신 거예요? 혹시 오늘이 휴일인가요?"

"아뇨. 너무 곤히 잠드셔서요. 깨실까 봐 잠시 카페 문을 닫았어요."

"네? 뭘 그렇게까지... 이렇게 신세를 많이 져서 어떻게 하죠?"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아주 오랜만에 산책을 해 봤어요. 늘 카페만 지키느라 꼼짝도 못 했는데 거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마침 벚꽃도 활짝 피었더라고요. 손님 덕분에 몇 년 만에 꽃길을 걸었으니 제가 오히려 신세를 진 거지요."

"그새 벚꽃이 만개하였나요? 이른 아침 지하철로 출근하고 밤늦게 지하철로 퇴근하다 보니 저는 어느새 땅 속 풍경에만 익숙해져 버렸네요. 꽃이 피고 지는 걸 보지 못한 지 오래예요."

"그럼 바로 요 앞이 벚꽃길인데 한 번 걸어 보실래요?"

"네? 그.. 럴.. 까요?"

그의 얼굴에 핀 미소가 눈이 부실 만큼 환하다. 이 카페에 다닌 후로 처음 보는 해사함이다. 그 맑음에 이끌려 K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다. 카페 문을 나서기 전 머리를 손가락으로 뜯어 빗고 블라우스를 치마 속으로 욱여넣고 올라간 치맛단을 끌어내린다.



그의 말대로 카페가 있는 골목을 돌아 나오니 도로변을 따라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벚꽃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터널 속을 그보다 살짝 뒤에 서서 천천히 따라 걷는다. 이따금 바람에 벚꽃 잎이 한 잎, 두 잎 까르르 웃으며 날아가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닥에 뒹굴던 꽃잎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친다. 시끄러운 벚꽃잎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에 K는 귀가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손님, 실례가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디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으세요?"

"네? 아니에요. 제 몰골이 이래서 놀라셨죠. 새벽에 오래 걸어서 그래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그럼 다행이에요. 커피는 드셨어요?"

"그럼요. 여전히 따뜻하더라고요. 신기하게."

"그게... 제가 여러 번 새로 만들어 가져다 놓았거든요. 드신 게 한 네 번째 라테일 걸요?"

"그러셨어요? 저는 쿠폰을 쓰고도 세 잔을 더 마신 거나 마찬가지네요. 사장님은 마음이 참 따뜻하시네요. 그리고 저는 미주예요. 고미주. 계속 손님이라고 부르시니...."

"아, 고미주 씨! 저는 카페 '숨'의 바리스타 박연우라고 합니다. 한참 뵈었는데 오늘 처음 만난 것만 같네요. 이렇게 이름을 알게 되니."

"네, 박연우 씨! 제가 '숨'을 많이 좋아해요. 처음엔 카페 이름에 끌렸어요. 그런데 라테 맛도 최고더라고요."

"하하하, 그래요? 언제든지 드시러 오세요. 칭찬받은 값으로 다음번 라테도 서비스입니다. 하하하."


연우의 웃음소리가 벚꽃잎들의 소란을 한꺼번에 뒤덮어버린다. 쨍하게 밝고 투명하게 맑고 아주 커다랗기까지 한 웃음이다. 미주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식어있던 작은 불씨 하나가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미주는 연우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간다.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출판사로 향한다. 오늘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회의 약속이 잡힌 날이다. 약속시간 1시간 전에 출판사 앞에 도착한다. 조용히 잰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곧바로 자기 자리로 직행한다. 모두가 각자의 일로 바빠서 사무실 안은 조용하고 미주의 등장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의자를 보니 어젯밤 P작가의 연구실에 두고 온 가방이 그대로 다시 놓여 있다.

'어떻게 된 거지?'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 편에 앉은 미영이가 톡을 보낸다. 미영은 미주보다 5살 어린 후배다. 이름이 비슷해서 자매로 오해받곤 하는데 실제로도 둘은 출판사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다. 미영은 제주도에서 뭍으로의 해방을 외치며 탈출했지만 십 년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고 바다를 보지 못하니 눈이 곪아가는 거 같다며 술만 마시면 미주를 붙들고 울었다.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갔다 왔어? 전화했더니 벨이 가방 속에서 울리더라고."

"너 혹시 오늘 맨 처음으로 출근했니?"

"아니, 영업부장이 나와 있었지. 납품 때문에 일찍 나올 때가 많잖아."

"그래? 알았어. 내 걱정은 마. 아무 일 없었어. 급히 다녀올 데가 있어서 나갔다 왔어."


'영업부장은 이 가방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는지 알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물어볼 수도 없고.'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번호를 보니 사장실이다. 어젯밤 결과가 궁금해서 잔뜩 몸이 달아있을 사장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걱정하며 사장실로 들어간다.


"미주 씨, 오전엔 어디 갔었대? 몇 번이나 전화했네."

"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나갔었어요. 급히 나가느라 복무 처리를 못 했네요. 바로 연가 처리하겠습니다."

"아, 그건 됐고. 어제 일은 어떻게 되었나. P작가가 집필 중이래?"

"네, 곧 작품이 나올 거 같아요. 제가 잘 부탁드렸습니다."

"그래? 회사에서 얼마든지 비용은 대줄 테니 앞으로 자주자주 악속을 잡도록 하게!"

"사장님, 그런데 제가... 어제... 아, 아닙니다."


사장은 이미 계약이라도 따낸 것처럼 들뜬 표정이다. 미주는 어제 일이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횟집에서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것, 택시를 탔던 것, 부드러운 손길이 계속해서 쓰러지려는 미주의 몸을 붙들어 주었던 것 밖에는 더이상 아무런 기억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휴대폰 메지지 알림이 울린다. P작가다.

"미주 씨, 가방은 아침 일찍 퀵으로 회사에 보냈네. 출근은 한 건가? 조만간 다시 봅시다."

미주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눈을 감으니 연우의 라테 위로 벚꽃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그 맛과 향기를 떠올리며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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