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란과 미영

미주의 동생

by 소위 김하진

미주는 미팅을 마치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서둘러 출판사를 빠져나온다. 이틀 치의 피로가 거대한 압착기가 되어 미주의 온몸을 짓눌러온다. 고통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몸을 쑤셔 넣는다.


"엄마! 엄마!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대는 어린 미주가 보인다. 전화기를 붙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절규하고 있다. 미주의 가슴팍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이란 이런 것일까?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입 밖으로까지 절규가 새어 나온다. 현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만이 신음하듯 흘러나올 뿐이다. 자신이 내뱉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오는 순간 미주는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닫는다. 중얼거림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뜨자 사방이 캄캄하다. 어둠을 삼킨 고요한 적막만이 저승사자처럼 차갑게 미주를 노려보고 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 마지막 순간을 이십 이년 째 꿈에서 반복하고 있다. 열 살 미주는 울며불며 악을 쓰며 소리 질러 보지만 그걸로 끝이다.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그 뒤로 이어진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결말을 바꿀 수 없었던 그날의 마지막 통화는 돌처럼 굳어서 미주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버렸다. 어머니는 열 살 미주, 다섯 살 미란이를 버리고 홀연 아빠 곁을 떠났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평일 늦은 오후,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미주야, 엄마야. 엄마가 네 이름으로 된 통장에 돈을 조금 넣어 놓았어. 네 방 책상 서랍에 가봐. 거기에 도장이랑 통장이 있을 거야. 그거 잘 가지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써라."

"엄마, 무슨 말이야? 왜?"

"엄마가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래. 아빠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알았지? 동생이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보살펴야 한다."

"무슨 소리야? 언제 오는데?"

"곧 올게, 잘하고 있어."

그렇게 끊겨버린 전화기를 붙잡고 어린 미주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 엄마!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어린 미주는 알았다. 어머니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미란이는 고함을 질러대는 미주를 놀란 토끼 눈으로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자기 인형으로 눈길을 돌리고 말한다.

"어니, 우리 꼬미가 무서대. 소리 지르지 마."


어릴 적 뇌성마비를 앓은 뒤, 다리가 불편하고 말도 어눌해진 미란이를 아버지는 끔찍이도 싫어했다. 미주는 아버지가 집에 오면 최대한 미란이가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이리저리 빼돌렸다. 그래도 눈치 같은 건 일절 볼 줄 모르는 미란이가 아버지에게 제 발로 다가가는 것까지 완벽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미란이가 아버지의 신경을 거스르는 날이면 동네방네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란이를 차마 때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대신 온갖 세간살이를 집어던지고 부쉈다. 사정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장애아를 학대하는 비정한 아비라고 손가락질하며 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약속한 듯이 혀를 쯧쯧 차 댔다.


열 살 미주는 그렇게 다섯 살 미란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로 날로 괴팍해지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받아내면서도 미주는 미란이를 살뜰히 보살폈다. 하지만 미란이는 축복받지 못한 삶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오래 낫지 않던 감기가 폐결핵이 되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초등학교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미주는 미란이를 가슴에 묻으며 어머니, 아버지도 함께 묻어버렸다. 미란이를 화장터에서 태워 보내던 그날로 미주는 세상에 혼자 남기로 결심했다.


출처 Pixabay



'띵동, 띵동'

현관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깜짝 놀란 미주가 몸을 일으켜 나가 본다.

"누구세요?"

"언니, 나야. 전화를 왜 그렇게 안 받아. 얼른 문 열어 봐."

문을 열자 미영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내가 너무 깊이 잠들었었나 봐. 지금 몇 신데 온 거야?"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가 다 되어 간다. 미영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빌라 안의 불을 있는 대로 다 켠다.

"또 등 하나 안 켜고 캄캄하게 있네. 저녁은 먹고 잔 거야? 옷도 아직 안 갈아입었네. 얼른 씻어. 내가 냉장고 뒤져서 뭐라도 먹을 걸 만들어 볼게."

떠밀리듯 욕실로 들어간 미주는 따듯한 물줄기에 차갑게 굳어버린 몸을 가져다 댄다. 낯선 온기에 소름이 돋았다가 이내 몸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이 물줄기를 타고 스르르 머리에서 가슴을 타고 다리까지 녹아내린다. 부옇게 김이 서린 욕실 거울에 미주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미주는 거울을 손바닥으로 박박 비벼 닦는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밖으로 나오자 미영이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있다.

"언니, 냉장고가 왜 이렇게 텅텅 비었어. 다행히 김치랑 참치가 있길래 찌개 끓였어. 계란 프라이 하나 겨우 했네. 얼른 와서 밥 좀 먹어. 아침부터 언니 얼굴이 영 안 좋아. 허옇게 질린 게 넋 나간 사람 같고 왜 그래?"

"아니야,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괜찮아 정말. 너는 밥 먹었니? 우리 같이 먹자."


식탁에 앉은 미주는 뜨거운 찌개를 후후 불어 한 입 떠먹는다. 미영은 음식 솜씨가 좋다. 미주도 혼자 산지 꽤 오래 지났건만 자기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일이었다. 늘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니 음식 솜씨는 더욱더 형편없어졌다. 미영이 가끔씩 차려주는 집밥을 미주는 한 톨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곤 했다.


"언니, 어제 P작가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걱정 많이 했어."

"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 아무 기억도 나질 않아."

"뭐라고? 이번엔 아예 필름이 끊겨 버린 거야? P작가는 아무 말 없고?"

"응, 아무 말하지 않아. 나도 묻지 않았고. 모르겠어."

"언니, 별일이야 있었겠어? 차라리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그냥 모르는 척해버려."

"그래, 그래야 하려나 봐."

"근데 언니 나 할 말이 있어 실은."

"그래? 뭔데? 말해 봐."

"그게.... 있잖아. 나 아이를 가졌어. 7개월 뒤면 태어날 거야. 그래서 출판사를 떠나야 할 거 같아."

"뭐, 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왜 아기를 가져.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너 술 먹었니?"

"언니, 진짜야. 난 엄마가 될 거야."


미주에겐 미란이나 마찬가지였던 미영. 그녀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오래돼서 망가진 식탁등이 깜빡 꺼졌다 다시 켜진다. 빛 그림자가 반쯤 드리워진 미영의 얼굴 위로 연한 미소가 번져 나간다. 미주는 할 말을 잃은 채 한참 동안 미영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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