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공허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가다

by 소위 김하진

미주는 할 말을 잃은 채 미영의 얼굴만 넋 놓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미영아,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이야? 왜 여태껏 나한테 한마디 말도 안 한 거야?"

"언니, 실은 많이 망설였어. 말할까 말까. 근데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 오늘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정말 언니한테 말하지 않음 안 될 거 같았어."

"휴... 그래, 아이는 건강하고?"

"응, 아주 건강하대. 심장 소리를 듣는데 고향 마을의 파도 소리가 들리더라고. 난 비로소 살아 있는 거 같았어."

"아이 아빠는 누구니? 내가 아는 사람이야? 결혼하기로 한 거야?"

"아니, 나 혼자 낳을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임신한 것도 몰라."

"무슨 소리야, 왜 몰라? 말을 해야지."

"그 사람은 아내가 있거든. 언니, 그 사람은 나를 많이 사랑해. 하지만 아내도 사랑해. 내게 온다면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이야. 난 모든 걸 잃고 망가져버린 그를 볼 자신이 없어."

"아이가 있다고 하면 네게 오기는 할 사람이야?"

미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린다.

"언니, 사실 그 사람은 아이가 있어도 내게 오진 않을 거야. 그걸 알기에 말하지 않았어. 말해버리면 모든 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잖아. 말하지 않는 게 뱃속의 아이에게 덜 미안할 거 같아. 언젠가 자라서 아빠를 찾으면 아빠는 네가 태어난 걸 몰랐던 거지 널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줄 거야."

"이 바보 맹추야, 대체 어쩌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미주는 종종 미영에게서 어린 미란의 얼굴을 보곤 했다. 지독히 순수해서 앞뒤 가릴 줄 모르고 덤벼드는 불나방 같은 아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마냥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던 사랑에 굶주린 미란의 모습이 미영에게도 있었다. 미주는 그런 미영을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부담스러웠고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일을 저지르고야 말 아이라는 걸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미영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참치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식어빠진 찌개를 들여다본다. 남은 찌개와 밥을 싱크대에 한 번에 쏟아 버리며 냄비를 내동댕이친다.

'대체 왜, 왜 그렇게 바보 같은 거야. 왜!!"


미주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특히 결혼한 남자들이 사랑 운운하며 덤빈다면 면전에다 대고 침을 뱉어주리라 다짐해 왔다. 미주에게도 그런 거지 같은 사랑이 없지는 않았다. 뻔히 알면서도 속았고 모르는 척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끝이 보이는 사랑에 몸을 던졌었다. 탐욕스러운 본능에 휘말린 남녀는 각자의 피해의식을 보상받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는 허울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한 환각제이자 도피처로 위험한 사랑을 갈구한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신기루 같은 욕망은 결국 일상을 부수고 삶을 파괴하기 시작하는데 딱 거기까지이다. 불현듯 눈을 뜬 남자는 지금까지 다디달게 피던 담배를 급히 짓이겨 꺼버리고 벌떡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남자에 비해 부서질 것도 잃을 것도 두렵지 않은 여자는 그만큼 현실 감각에 더디다. 홀로 남은 후에도 여전히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심지어 스스로 숭고한 사랑의 순교자가 되길 자처하기까지 한다.


미영은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을 연기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미영은 지금 순교자가 되려고 한다. 미영이 흘리는 피를 고운 비단에 그대로 받아낼 것인지, 강제로라도 사형장에서 끌어내려 더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할 것인지 미주는 혼란스럽다. 어린 미란이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고 결국 고통에 짓눌리다 생을 등지고 만 것처럼 미영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미주는 침대에 꼿꼿이 기대앉아 어찌할 수 없는 불면의 밤을 지새운다.


안으로 연한 회색빛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 때쯤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문구가 뜬다.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외출할 채비를 한다. 1시간 정도 지하철을 탄 후, 거기서 30분 정도 버스를 더 타고 들어가면 '아버지'가 있는 곳이다. 미주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이후, 알코올 중독이 되었고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다. 미란이 떠난 날, 미주는 아버지를 마음에 묻어 버렸지만 현실에선 모든 걸 잊고 시간을 거꾸로 살아가는 아버지가 남아 있었다.


출처 Pixabay

끝이 보이지 않던 빌딩들이 안개처럼 걷히고 난 자리에 조금은 처연하고 을씨년스러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길목에 봄꽃들이 형형색색 다채롭고 풍성하다. 꽃들로 한껏 치장한 덕분인지 멀리서 본 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도 정성스럽게 꽃을 심어놓은 것은 잠시나마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요양원 원장의 상술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환자도 보호자도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정원이다. 산책을 나온 몇몇 노인들은 꽃 무더기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웃고 있다. 한둘은 화관을 머리에 얹고 꽃 목걸이까지 두르고 있다. 그중 한 노인이 미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다가온다.


"순이야, 뭐땀시 이래 늦었냐잉, 우리 퍼뜩 냉이랑 달래랑 캐러 가자잉. 봄나물이 산이고 들이고 지천이여."

미주는 병원에 올 때마다 이 노인에게 붙들리곤 한다. 노인에겐 순이와 봄나물을 캐러 놀러 다니던 때가 생에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을까. 곁에 있던 요양보호사가 나서서 노인의 손을 잡아끈다.

"옥순 할머님, 이분은 친구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시방 뭔 소리여, 순이 맞는디."

이끌려 가면서도 미주 있는 쪽을 계속해서 돌아본다. 그 눈빛이 하도 간절해서 미주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버지는 늘 방에만 있다. 산책을 거부한 채 멍하니 TV만 본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주가 와도 TV를 보는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조차 없다. 미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옆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혼잣말을 한다.


"아빠, 나 왔어. 살이 좀 빠졌네? 수염을 좀 깎아야겠다. 이제 봄이야. 여기서 몇 번째 봄을 맞는 거더라 ... 밖에도 좀 나가봐. 아빤 봄이면 가방 하나 둘러메고 낚시를 다녔잖아. 꽃도 보고 강도 보고 물고기도 잡는다고 일석삼조라며. 난 그 물고기 엄청 싫어했었지. 실은 지금도 민물고기는 안 먹어. 아빠가 잡아온 물고기들이 수돗가에서 파닥거리며 날뛰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정말 잔인했거든. 그 비늘들은 또 어떻고. 집안 여기저기 번쩍거리며 붙어 있는 은색 비늘이... 죽음의 흔적이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몰라. 아빠가 낚시를 좋아하는 건 늘 의외였어. 하도 궁금해서 한 번은 아빠를 따라갔잖아. 난 지루해 미쳐버리는 줄 알았지.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종일 강만 바라보더라? 뒤론 다신 아빠를 안 따라갔지. 아빠는 하루 종일 TV만 보는 거 지루하지도 않아? 그러고 보면 아빤 지루한 걸 참 잘도 참네. 난 지루한 걸 못 참아서 사는 게 이런 모양이야. 아빠? 한 번 봐봐. 나야, 미주!"


미주는 그만 입을 다물고 아버지 옆에 앉아 조용히 TV를 본다. TV 속 사람들은 깔깔거리지만 무엇 때문에 웃는지 알 수가 없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미주는 조용히 일어선다.


"아빠, 한 달 뒤에 또 올게. 잘 지내고 있어."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은 공허하고 무표정할 뿐이다. 미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대로 돌아 나온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동안 아까보다 조금은 시들어버린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스쳐가는 풍경을 강하게 뒤로 밀어내며 요양원을 서둘러 빠져 나간다.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이야, 담에 또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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