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에게로 내딛다
아버지를 보고 돌아 나오는 순간부터 미주의 머릿속엔 연우의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래 미뤄둔 대청소를 시작한다. 방을 쓸고 닦고 변기를 박박 문지르고 하수구에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던 머리카락 뭉치도 말끔히 쓸어낸다. 이제 그만 그에게서 벗어났다고 안도할 때쯤 라테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쌉싸래한 라테가 혀를 감아 도는 순간 미주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뭐야, 잊어버려, 그만.'
아직까지도 옷장에 걸려 있는 겨울 옷들을 몽땅 꺼내서 차곡차곡 개어 박스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박스에 있던 여름옷들을 꺼내어 옷걸이에 걸고 차례대로 옷장 안에 정리한다. 옷장이 여름옷으로 가득 찰 즈음 느닷없이 연우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도저히 안 되겠어. 그냥 연락하자. 까짓 거.'
가방을 뒤져보니 카페 쿠폰이 나온다. 만약에 쿠폰 뒤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면 미주의 열망은 그걸로 조용히 시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아주 작은 우연이 중첩되다가 어느새 필연적이고도 중대한 운명으로 진행되어 가는 것이고, 찰나의 엇갈림은 아무리 귀한 인연이라도 그 끈을 끊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미주의 눈에 '숨'의 전화번호가 들어오는 순간, 미주는 연우에게로 향하는 인연의 발걸음을 한 발 내디뎌보기로 한다.
"안녕하세요? 카페 '숨'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저... 고미주예요. 기억하세요?"
"미주 씨! 당연히 기억하죠. 웬 일로 전화를 주셨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니에요. 실은 며칠 전 제가 너무 큰 신세를 져서요. 무한리필 라테도 그렇고요.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고 싶은데요.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말이에요."
"부담이요? 저는 아주 좋기만 한데요? 하하하, 이렇게 전화까지 주셨으니 사양하지 않을게요. 저희 카페는 매주 화요일이 휴무입니다. 다음 주 시간 괜찮으세요?"
"그럼요, 제가 사장님, 아니 연우 씨한테 시간을 맞춰야죠. 월요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잠깐만요, 이건 카페 전화잖아요. 제가 이 번호로 휴대폰 번호 남길게요. 거기로 다시 연락 주세요."
"아, 네. 그럴게요."
미주와 연우는 화요일 저녁, 카페 '숨'과 미주의 집 중간 지점에서 만난다. 미주는 그간 연우를 여러 번 보았지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임을 깨닫는다. 며칠 전 함께 길을 걸을 때도 미주는 엉망이 된 자기 몰골이 부끄러워서 연우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제 보니 연우는 생각보다 키가 크고 마르고 하얗다. 머리칼이 유난히 연한 갈색을 띤 곱슬머리인데, 눈동자 색이 같은 걸로 보아 염색한 머리는 아닌 듯하다. 안경이 제법 잘 어울리는 선한 눈매를 지녔고 반듯한 코와 부드러운 입술의 호감형 얼굴이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무늬 없는 셔츠를 받쳐 입고 컨버스화를 신은 그의 담백한 옷차림이 왠지 그를 무향무취의 무채색으로 보이게 한다.
"미주 씨, 술 마셔요?"
"네, 조금 마셔요. 드실래요?"
"그러죠, 우리."
미주와 연우는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이 고종이 아니라 김대건 신부일지도 모른다는 연우의 말에 미주는 깜짝 놀란다. 연우가 들려주는 커피 이야기에 미주는 깊이 매료된다. 미주 역시 자신이 라테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부터 열까지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취기가 올랐을 무렵, 연우가 조심스레 그날의 사연을 묻는다. 미주는 술에 취한 탓인지 그간 P작가와 있었던 일들을 연우에게 모조리 털어놓고 만다. 연우는 흥분한 듯 벌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 자식, 작가도 아니네요. 저는 작가들은 다 고상하고 도덕적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요?"
"하하하, 연우 씨. 작가도 이미지로 먹고사는 거예요. 연예인처럼. 여자의 몸으로 세계의 온갖 오지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책으로 내서 유명해진 K 작가라고 있잖아요. 인터뷰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자기 속눈썹을 안 가지고 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글쎄 스텝한테 집에 가서 자기 속눈썹을 가져오라고 시켰다네요. 사람들 모두 그녀만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죠. 아프리카 오지에서 씻지도 못하고 돌아다녔다는 사람이 그놈의 속눈썹 하나 때문에 사진을 안 찍겠다니 너무 웃기지 않아요?"
미주는 정말로 작가들의 이중적인 작태에 신물이 난 것인지, 작가가 되지 못한 스스로의 자격지심에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한참을 작가에 대한 풍문을 안주거리 삼아 씹어댄다. 그런 미주의 날 선 이야기에도 연우는 한결같이 맞장구를 쳐주며 경청한다.
"미주 씨는 혹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세요? 출판일을 하시는 분들 보면 대개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리는 미주. 실컷 작가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은 뒤라 본인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는다. 중대한 약점을 들켜버린 타자처럼 어떻게 배트를 잡고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럽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소주잔만 들여다보고 있는 미주에게 연우는 황급히 화제를 돌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우는 뜻밖에도 의대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던 연우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으나 도저히 매스를 손에 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피를 보면 새하얗게 질려 버렸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도 평생을 꿈꿔온 일이었기에 악착같이 버텨서 좋은 의사가 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해부학 실습 도중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진 연우는 그 자리에서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그날로 연우는 의대를 관두었고 집에서도 퇴출당했다. 부모님은 의사고 형도 의사였다. 의사 집안에서 연우는 홀로 낯선 이방인이자 외딴섬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후, 밤낮없이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지금의 카페 '숨'을 간신히 열 수 있었다. 고백성사라도 하듯 담담히 이야기하는 연우의 낮게 잠긴 목소리와 연하게 흐려진 눈동자 속에서 깊은 허무와 고독의 진물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미주는 연우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매스를 쥐기엔 너무 아름다운 손이라는 생각을 한다. 연우는 미주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예의 평소와 같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돌아간다. 그의 웃음소리가 시원한 콜라라고 생각했던 것은 미주의 착각이었다. 저녁 공기에 흩어져가는 그의 웃음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작게 부수고 부숴 먼지처럼 가볍게 날려 버리고자 하는 연우만의 고독한 안간힘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