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씨, 나 P요. 시간 있는가?"
"네,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시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음.... 잠시 보지. 내가 휴대전화로 약속장소와 시간은 보낼 테니 그리고 나오게."
"아... 네."
끊겨버린 전화. 잠시 후 문자 알림음이 온다.
'OO역 숨 카페, 오후 7시.'
미주는 순간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을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숨 카페라고? 이 사람도 거길 안다고?'
아무리 P작가의 대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구석진 곳에 있는 그 작은 카페를 P작가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늘 만나면 술을 마시자던 그가 오늘따라 카페로 불러낸 이유도 미주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여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또 마시며 여러 차례 탕비실만 왔다 갔다 들락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미주를 보고 미영이 따라와 묻는다.
"언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P작가가 만나자고 하네. 근데 왜 만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것도 카페에서."
"아, 그래?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괜히 겁먹지 마. P작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무슨 말이야? 그 인간 소문이 얼마나 더럽게 났는지 몰라서 그래? 만날 때마다 기분이 거지 같다고."
"언니, 무슨 일 있으면 내게 꼭 연락해. 알았지?"
"응, 그럴게."
'숨'에 들어서자마자 P작가와 연우의 눈이 동시에 미주에게로 향한다. 미주는 연우에게 슬쩍 눈인사를 하고 곧장 P작가에게로 향한다. 다행히 연우가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자리라 안심한다. P작가의 술에 취하지 않은 얼굴은 생각보다 젊어 보이고 눈빛은 온화해 보인다. 미주는 같은 사람인 줄 알면서도 왠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P작가 앞에서 쭈뼛쭈뼛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작가님, 그때는 제가 실례가 많았어요. 앞으로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어요.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땐 우리 둘 다 많이 취했었지."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건지요?"
P작가는 가방을 열더니 두툼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것은 지난번 술자리에서 보았던 원고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술에 정신을 팔아버린 대가로 원고 속 내용은 이미 기억 속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렴풋한 그날 대화의 잔상만이 미주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 원고 기억하나? 그날 이 작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지."
"네, 조금은 기억나요. 그런데 이걸 왜요? 혹시 완성작을 저희 출판사에 넘기시는 거예요?"
미주는 놀람과 흥분으로 갑자기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하며 뛰기 시작한다. 이내 P작가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이 소설은 아직 미완이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작품이지. 미주 씨의 의견을 듣고 싶네.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하여. 소설을 읽어보면 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거네. 그럼 그때 다시 만나지."
출처 Pixabay
그러고는 P작가는 미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일어서 나간다. 놀란 미주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테이블 위의 원고와 P작가의 뒷모습만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P작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미주는 머릿속이 하얗기만 하다. 마침 연우가 라테를 들고 미주에게로 다가온다. 아무 말이 없는 미주 앞에 라테 한 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연우는 그 길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미주는 떨리는 손으로 연우의 라테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원고를 펼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토마스와 테레사! 향락적이고 에로스적인 관계를 추구했던 토마스는 사랑에 있어서는 한없이 가벼운 남자였고, 그런 토마스를 사랑하는 테레사는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원하는 여자였다. 테레사는 질투심에 영혼의 눈이 멀 정도로 오로지 사랑에만 투신했다.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무겁고 버거운 사랑이요, 빠져들면서도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사랑이었다. 문득 숱한 젊은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쾌락을 추구한다던 P작가가 떠오른다. 그가 토마스 자신이라면 테레사와 비슷한 소설 속 이 여자는 누구인가? 소설은 둘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도중 돌연 멈춘다.
'뭐 어쩌라는 거야? 이 소설을 내게 왜 준 거지?'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미주에게 연우가 다가와 앞자리에 앉는다.
"미주 씨,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혹시 아까 그 사람이 P작가인가요?"
"네, 맞아요."
"역시 그랬군요. 근데 그 사람 여기 자주 왔었어요. 혼자는 아니고 늘 같이 오던 여자가 있었죠."
"그래요? 어떤 여자였죠?"
"나이는 미주 씨보다 어려 보였어요. 그 남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죠. 왜 눈을 보면 알잖아요. 남자를 바라보는 눈에 늘 그리움이 가득했어요. 함께 있으면서도...."
"그녀가 부서질 것 같은 테레사군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미주는 P작가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평생 외롭게만 할 남자라는 걸 안다. 하지만 테레사는 토마스 없이는 죽은 껍데기나 다름없다. 무엇이 둘에게 최선의 선택일까? 아니 테레사에게 더 나은 결말일까.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와 오직 한 남자만 바라보는 여자의 벼랑 끝 같은 이 사랑을 어찌해야 하나. 미주는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생각의 꼬리를 붙든 채로 계속해서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 한 번 치달은 의심은 아무리 떨치려 해도 머리카락에 붙은 껌딱지처럼 지독하게 엉겨 붙어 절대로 떨어지질 않는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언니, 별일 없어?"
"응, 괜찮아."
미주는 휴대전화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전화기 너머 미영에게 묻는다.
"미영아, 너 혹시....."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미영의 나지막한 한숨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언니...."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