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란을, 미영을, 테레사를 위하여
P작가를 벌하기로 하다
사랑이란 신기루와 같아서 환희와 희열에 온몸을 떨게 하다가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신기루가 걷히고 난 뒤 깊은 모래 무덤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이미 몸 안 가득 모래가 가득 차 있고 영혼까지 모래알에 부딪혀 서걱거린다. 눈은 따가워 뜰 수가 없고 모래를 삼킨 입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수많은 모래알들이 미세하게 긁어놓은 심장은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 끝내 무덤 속으로 완전히 삼켜지고 나서야 '사랑 안에 낙원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짧은 사랑은 영원과도 같은 인고의 시간을 남긴다. 깎이고 깎여 모래 무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없이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몸 안의 모든 모래가 허공으로 날아가 흩어지고 난 후에야 다시 눈을 떠 해를 볼 수 있고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있고 심장이 살아나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랑이란, 거대한 모래바람과 함께 위대하지만 비참한 서사를 만든 뒤 애초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시간 속으로 허무하게 소멸한다.
미영은 한참을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고 미주 역시 더는 캐묻지 않는다. 전화를 끊은 미주는 반쯤 남은 라테의 거품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서둘러 원고뭉치를 챙겨 들고 일어선다. 성큼성큼 카페 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미주를 본 연우는 덩달아 따라 일어서지만 이미 미주는 문 밖으로 나가버린 뒤이다. 카페 밖으로 나온 미주는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어딘가 급히 가야 할 데가 있는 사람처럼 보폭을 최대한 늘려 숨이 가쁠 정도로 걷고 또 걷는다. 이따금 이렇게 미친 듯이 걷다 보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미주에게 선명히 떠오르곤 했다.
그때 어디에선가 미주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미란의 웃음소리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미주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들 한 무리가 까르르 꽃가루 같은 웃음을 흩뿌리며 거리를 걷고 있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봄 산책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다.
'미란아, 네가 해맑게 웃고 있구나.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도 너는 언제까지나 저 아이들이겠지. 영원히 너는 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나의 순수겠지.'
집으로 돌아간 미주는 P작가의 원고를 펼쳐 놓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것이 미란의, 미영의, 테레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면 기꺼이 모든 걸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남은 휴가를 모두 당겨서 연차를 내고,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집필에만 매달린다. 미주 자신이 쓴 소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 소설은 미주에게 일종의 기도문이자 유서와도 같았다.
미주는 모래 무덤에 파묻혀 서서히 죽어가던 테레사를 소생시키고 테레사와 토마스를 다시 한번 신기루 속에 가둬두는 것으로 소설을 수정한다. 거짓이 가득한 마무리가 소설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애써 외면한다. P작가가 거부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주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작품의 결말을 바꾸고야 말 생각이다.
"작가님, 제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써 봤어요.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러지. 지난번 카페에서 보지. 오늘 저녁 7시에."
"네."
열흘 가까이 두문불출하며 집필에만 매달린 미주는 부쩍 살이 내린 모습이다. 걸을 때마다 하늘이 훅 멀어지고 땅이 푹 꺼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찌른다. 휘청이는 미주를 본 연우가 급히 뛰쳐나와 부축한다. 지난번과 동일한 테이블에 P작가가 앉아 있다. 문쪽을 등지고 있어 미주가 들어온 걸 보지 못한 눈치이다. 미주는 연우의 손을 얌전히 무르고 천천히 P작가에게로 간다. 자리에 앉은 미주는 말없이 가방에서 원고를 꺼내 놓는다. P작가의 눈빛이 매섭게 원고로 꽂힌다.
"벌써 마무리짓다니 빠르군. 내가 한 번 보고 말해도 되겠지?"
"네, 당연하죠."
P작가가 원고를 읽는 동안 시간이 정지하고 미주의 숨도 함께 멈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어갈 무렵, P작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 전체에 경멸과 조소가 가득 차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그러고는 원고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툭 던져 놓는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이 소설을 맡긴 건 미주 씨의 실력을 믿기 때문인데, 내 작품을 가지고 장난질을 해? 이 억지스러운 결말이 소설에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작가님, 혹시 우리 출판사에 근무하는 미영이를 아시나요?"
"알지, 몇 번 만났으니까."
"그게 다인가요?"
"아니 여러 번 만났지. 그게 미주 씨가 상관할 일인가?"
"제게 이 소설을 주신 거 미영이와 관련 있지 않나요?"
P작가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마치 미주가 할 말과 행동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미주 씨한테 부탁한 거야. 미영에 대해 잘 아니까 이 소설을 완벽하게 만들 방법도 생각해 낼 줄 알았지. 게다가 지난번 술자리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미주 씨한테 의리를 지키려 했지. 그런데 자네는 지금 보니 예술에 대한 예의가 없구먼. 작가로서 자격 미달이야. 동료에 대한 사적인 마음을 지금 작품 속에 억지로 욱여넣은 건가? 물론 이 소설을 미영이한테 넘겨 보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 뭔가 더 그럴듯한 결말을 생각해 낼 것도 같았거든. 하하하. 그래도 미영이 내게 영감을 주었으니 예의는 지켜야지 싶어서 미주 씨한테 준 거지. 소설의 결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꽉 막힌 절벽 같았는데 말이야. 지금 미주 씨가 쓴 결말을 읽으니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는군. 수고했네. 큰 도움이 되었어. 나를 도와준 대가로 이 소설은 완성되면 자네에게 넘기도록 하지. 이번엔 꼭 약속하지."
"지난번 술자리? 그때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거야? 미친놈! 미영이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그건 알기나 해?"
"무슨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가 내게 말한 적이 없으니 내가 미주 씨 말만 듣고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지."
"미영이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어. 모든 걸 잃어도 괜찮을 만큼.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의 존재를 숨긴 거고."
"그렇다면 미영의 뜻을 존중해 줘야지. 안 그런가? 나는 빨리 가서 이 소설을 마무리지어야겠네. 지금 완벽한 마무리가 떠올랐단 말일세. 완성되면 연락하지."
그러더니 얼굴 가득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원고를 들고일어나 나가버린다. 미주는 P작가에게 분명 아이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정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 미영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구나.'
미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그때 마침 연우가 라테를 들고 와 미주 앞에 앉는다.
"미주 씨, 괜찮아요? 저 작가만 만나고 나면 많이 힘들어하는군요."
"그러게요. 악연인가 봐요. 하지만 내 인생에서 꼭 만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 같아요."
"함께 다니던 여자를 미주 씨도 아는 건가요?"
"네, 제 동생이에요."
"네? 전혀 닮지는 않았던데요. 그런데 저 작가 유부남 아닌가요?"
"네, 그는 내 동생을 유린했고 나는 저자를 벌줘야만 할 거 같아요. 이번엔 지켜야만 해요. 내가 원하는 결말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모든 걸 파괴해 버릴 거예요."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미주의 중얼거림에 연우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한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미주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연우는 생각한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래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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