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얼굴도 몸도 작아서 곧 소멸해 버릴 것만 같은 한 중년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미주는 그녀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임을 직감한다. 그녀를 향해 눈길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 역시 미주를 알아보고 방향을 틀어 미주에게로 다가온다. 느리고 작은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안녕하세요? 00 출판사 고미주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뜬금없이 연락드려서 놀라셨지요? 작가님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 그녀의 눈가를 날카롭게 긋고 지나간다. 미주는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에게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작가님과의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조금 있었어요. 그게...."
"말씀하세요."
입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P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미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동생이 작가님을 많이 사랑했어요. 혼자서 작가님의 아이까지 낳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이를 잃어버리고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이다. 그저 처음과 똑같이 느릿느릿하고 작은 목소리로 기계적인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러셨군요. 동생분 마음의 상처가 크시겠습니다."
"네, 그렇죠. 무엇보다 아이를 잃은 것에 상심이 큽니다. 그리고 P작가가 아이를 외면해 버린 것도요!"
"네, 그러시겠네요. 제가 뮈라도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화를 내셔야죠. P작가에게도, 내 동생에게도요!"
"아, 네. 죄송합니다."
순간 그녀를 만난 게 커다란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파도처럼 미주를 거세게 덮쳐 온다. 부서지려고 하는 찰나의 물거품은 오직 절망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마지막 간절한 몸부림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고독한 최후를 맞을 것이었다. 하지만 미주는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낱낱의 고통들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미주가 원하던 결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P작가의 작태를 아내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군다나 P작가는 뻔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이니 지금껏 아내가 알든 모르든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 미영은 P작가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놀라울 것도 당황스러울 것도 더 이상 수치스러울 것은 더더욱 없는 그렇고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미주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만다.
"작가님에 대해 이미 다 알고 계신 거군요. 이렇게 침착하실 수 있다니 놀랍네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런 일을 대체 얼마나 자주 겪으셨던 거예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미주 씨가 처음이네요. 마지막이 한 세 달 전쯤일 거예요. 스물두세 살 되어 보이는 앳된 여대생이 남편과 이혼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꼬리에 흐릿한 냉소를 머금는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고 머지않아 눈에서는 눈물 대신 모래가 쏟아져 나올 것임을 미주는 예감할 수 있었다. 그녀도 미영처럼 사랑이라는 신기루에 갇혀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가련한 순교자였던 것이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채로.
"어떻게 이렇게 참고 사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왜 다 용서해 주시는 거죠?"
"용서요?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하고 말고 가 무슨 의미가 있지요? 제가 용서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 박장대소하며 웃을걸요? 그는 사랑을 전혀 믿지 않아요. 그러니 어떤 여자를 만나도 다 무의미한 거지요. 저는 원망할 수도 없어요. 그러면 저 역시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될 뿐이니까요."
"그럼 P작가는 사모님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사모님은 P작가를 사랑하시나요?"
"사랑? 사랑하죠. 이게 사랑일 리는 없겠지만요."
그녀는 끝까지 미영의 처지를 동정했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P작가에 대한 말은 그 어떠한 것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미쳐가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였지만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한 거짓말로 만들어진 성 속에 숨어서 한 발짝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기세였다.
출처 Pixabay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 미주는 출판사로 향한다. 몇 달 동안 서랍에 넣어 두기만 했던 사직서를 꺼내 다시 읽어본다. 밤이 새도록 작가들에게 술 접대를 하던 날이었다. 지하철도 끊긴 새벽, 미주는 집이 아닌 출판사로 되돌아왔었다. 블라인드를 빈틈없이 내려놓은 사무실 안은 달빛조차 새어들지 못할 만큼 짙고 컴컴한 어둠이 장악하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터운 어둠의 장막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뚫고 들어오더니 이내 또 다른 빛들이 하나 둘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빛들이 모여 사위가 환해지는 순간, 미주는 스스로에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티 하나 없이 사라지고 나면 사직서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러지 못했다. 모닝 라테를 사들고 온 미영의 외로운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을까?
미주는 사장의 책상 위에 사직서를 올려두고 그 길로 곧장 출판사를 나와 병원으로 향한다. 조금은 핏기가 돌아온 미영이 미주의 얼굴을 보자 환한 미소를 짓는다.
"미영아, 이제 좀 괜찮아?"
"응, 언니. 고마워. 이제 하혈은 멈추었대."
"잘 됐다. 이제 다 끝났어. 나도 사직서를 냈어.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언니, 무슨 소리야. P작가의 소설은 어쩌고. 언니가 대표 편집자가 될 수 있는 기회였잖아. 그 소설로 이 바닥에서 언니 입지도 올라갈 건데 왜 그 좋은 기회를 버려."
"상관없어. 그리고 P작가의 소설은 이미 읽어 봤어. 졸작이야. 아무리 그가 유명 작가라 해도 그 따위 소설의 편집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언니, 나 때문이지? 난 정말 괜찮아. 병원에서 나가면 이 도시를 떠나려고 해. 내 아이가 숨을 쉬고 잠을 잘 수 있는 바다로 갈 거야."
"어, 그래. 같이 가자. 나도 이젠 더 이상 이 도시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거 같거든. 근데.... 너... 아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도록 푹 쉬자."
몸과 마음이 부서진 미영은 이제 기억도 온전하지 않다. 뱃속에 아이가 있을 때 환희에 차 있던 미영과 아이를 잃고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미영 사이를 수시로 오가고 있다. 미주는 미영이 거짓 속에서라도 그냥 살아내 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작가의 그녀가 거짓에 길들여져 모든 생의 감각이 마비된 채로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현실로 돌아온 미영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임을 미영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미영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주는 얼마든지 미영의 거짓말에 공범자가 되어 주리라 다짐한다.
출판사로부터 약간의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지금껏 넣고 있던 적금을 깨고 살고 있는 빌라도 부동산에 내놓았다. 이 집은 미주의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들어갈 때, 집을 팔아 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얻은 전세이다. 있는 대로 돈을 죄다 끌어모으면 미영과 함께 떠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목돈이 생긴다. 그런데 미주의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 자꾸만 따갑게 찔러대는 존재가 있다. 미영에게 아이가 필요하듯이 미주에겐 연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주는 연우가, 연우의 라테가 미치도록 그립다.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