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떠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미주와 아버지, 각자의 길을 떠나다

by 소위 김하진


"여보세요?"

"고미주 씨? OO요양원입니다. 아버님께서 지금 OO병원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통화가 되지 않아서 일단 병원으로 먼저 옮겼습니다. 빨리 가 보세요."


아버지는 여전히 먼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미주는 요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기억 너머에 가 있는 아버지는 미주를 보지 않는다. 미주 역시 아버지를 마주하지 않는다. 둘은 각자 무관심한 채로 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본다.


"아빠, 나 드디어 회사를 그만뒀어. 그리고 이 도시도 떠날 거야. 처음부터 여기엔 내가 속할 곳이 없었어. 한 순간도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도시는 계속해서 나를 밀어내는데 나는 악착같이 썩은 줄 하나를 붙들고 매달려 있었어. 그 줄을 놓아버리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 그런데 아빠, 이제 나는 그 손을 한 번 놓아 보려고 해. 내가 미친 걸까?"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어느새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다. 미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와 같은 방향을 다시 바라보며 초점 없는 눈으로 말을 잇는다.


"옛날에 말이야. 엄마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소설책만 읽었던 거 기억나? 아빠는 엄마가 온종일 책만 붙들고 있다고 막 화를 냈었잖아. 그런데 이제 알겠더라. 엄마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어서 그렇게 미쳐버리고 말았던 거야. 자기 인생이 소설이라도 되는 것인 양 착각했던 거지. 그래서 시시한 삶을, 권태로운 우리를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야. 아빤 엄마가 소설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근데 아빠, 나도 그때의 엄마랑 똑같아졌어. 삶이 시시해 죽겠어. 내 삶에서 시시하지 않은 건 우리 미란이뿐이었지. 미란이를 기억해? 아빠가 그렇게 구박했던 내 동생. 아빠는 좋겠네. 하늘나라에 가면 미란이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만나면 꼭 미란이에게 사과해야 해. 알았지, 아빠?"


미주는 면회 시간이 끝나자 그 길로 병원을 나와 '숨' 카페로 향한다. 도시 전체가 미주의 등을 거세게 떠밀며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발도 더 내딛을 곳 없는 도시의 끄트머리에서 미주는 까치발을 들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떠미는 힘을 향해 버텨 선다. 하지만 곧 추방당하고 말 것이다. 아니 그전에 스스로 추방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때까지 조금만 시간을 벌자고 생각한다.


카페 '숨'에 들어서자 연우가 특유의 바람 한 점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미주를 맞이한다. 미주는 연우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가슴에 작은 구멍 하나가 뚫리는 것을 느낀다. 온몸에 가득 들어차 있던 억지와 자학의 힘이 피식 소리를 내며 조금씩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기분이다.


연우가 라테를 들고 미주에게로 온다. 평소와 달리 라테 위 나뭇잎 그림이 흐트러져 있다. 미주는 연우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이 남자에게도 권태의 늪에 빠져들게 하는 일들이, 삶을 끊임없이 시시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출처 Pixabay

"미주 씨, 미영 씨는 이제 좀 괜찮은가요?"

"네, 좋아졌어요.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죠. 마주 씨는 괜찮은가요? P작가 부인 만나고 많이 힘들진 않았어요?"

"그걸 기대하고 만난 거였어요. 나 역시 미영과 고통을 분담하고 싶었죠. 죄책감의 형태로라도 내가 감당할 몫이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P작가의 부인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더군요.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무해했어요."

"늘 예상을 비껴가는 게 인생이죠."

"저 실은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모든 일들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네요. 출판사를 그만뒀고 집은 내놓은 상태예요. 집이 정리되면.... 이 도시를 떠나게 될 거예요."

"그렇군요. 모두가 떠나는군요. 이 도시는 언젠가 떠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군요. 시끌벅적한 외로움이 들끓는 곳."


잠시 둘은 서로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흐릿하지만 확실한 공모의 눈빛을 교환했으나 막상 둘은 알아채지 못한다.

"미주 씨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저는 응원합니다. 그런데 라테는 어쩌죠? 미주 씨 없는 저의 라테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데요. 하하하하."

연우는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웃음을, 목소리 뿐인 웃음을, 가볍되 쓸쓸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미주의 눈앞에 무심히 쏟아놓는다. 미주는 그 웃음이 품은 가시에 찔려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만다. 라테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올 때까지 미주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 뒤에서 연우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미주 씨, 제가 라테 무한리필 쿠폰 드린 거 아시죠? 평생 유효합니다."


미주는 서둘러 짐을 챙겨 미영의 집으로 향한다. 미영은 퇴원 후 홀로 집에 있다. 오전과 오후, 낮과 밤 아니 시시각각 미영의 가슴은 바다가 되었다 사막이 되었다 한다. 미주는 미영과 함께 조금은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주가 이 도시를 버리고 새롭게 잡은 이 줄은 예전과 같은 썩은 줄이 아니다. 미주와 미영을 살리고 미란을 부활시켜 낼 생명의 줄인 것이다.


"미영아, 언니 집은 정리됐어. 이제 이 집만 빼면 돼. 너의 고향으로 가자.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언니, 난 안가. 내가 다시 시작해서 뭐 해."

"왜 그래? 아이를 위해 떠나기로 했잖아."

"아이? 이미 죽은 아이잖아.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내 안에 아이는 없다고!"


미영은 죽어가는 짐승처럼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몇 시간 뒤면 미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을 거라는 걸 미주는 안다. 미영에게 약을 먹이고 한숨 자도록 침대에 눕힌다. 지친 미주도 미영 곁에 스러져 잠이 든다.


"고 OO 씨 보호자시죠? 지금 아버님께서 위독하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어요."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미주는 마지막 줄 하나가 힘없이 툭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다.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미주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이제는 더 이상 할 말도 해야 할 말도 없음을 느낀다.


"잘 가. 아빠."


아버지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도대체 어디로 가란 인사란 말인가? 미주는 심장이 멈추고 기계 위로 지나가는 평행이 된 선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저 선 위에 올라타서야 아버지의 영혼은 오랜 방황을 멈추고 제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눈이 비로소 헤매지 않고 길 위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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