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카페 문을 닫고 미주의 곁을 지켜주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미영에게는 일부러 알리지 않고 며칠간 볼 일이 있어 집을 비운다고만 했다. 오랜 요양원 생활로 사회와 단절되어 있던 아버지에겐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소지한 적이 없으니 부고를 알릴 곳도 더는 알 수 없었다. 요양원 식구들 한둘이 들러 미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주는 연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미주와 연우 단둘이서 하나의 정물이 되어 지키고 있었다. 화환들은 끝없이 늘어서 있었으나 아버지가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마치 바다가 두 갈래로 갈라진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공간은 내부도 외부도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마치 살아생전 아버지의 눈빛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삶은 흑백 사진 같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그 어떤 소리도 색도 향도 없이.
아버지를 화장한 미주는 유골함을 들고 미란을 묻었던 곳으로 향한다. 연우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미주를 뒤따른다. 미란을 묻었던 나무는 예전 그대로이다. 연우와 미주는 나무 옆에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는다.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된 둘은 철퍼덕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다. 간간히 실바람이 불어오고 미주는 바람에 실린 미란의 여린 향기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미주 씨, 여긴 어딘가요?"
"미란이가 있는 곳이에요. 아버지는 미란이를 꼭 만나야 하거든요. 여기에 묻으면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미란에게 용서를 빌 거고 미란은 아버지를 용서하게 될 거예요. 마침내."
"아버지가 원했던 일일까요?"
"글쎄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삶에는 자기만의 과업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에겐 그게 미란이였을 거예요. 아마도."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요?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겠죠. 언젠가 요양원에서 들었어요. 한 할머니가 아버지를 보러 왔다고 하더군요. 아버지 곁에 앉아서 눈물만 흘리다 갔다고 했어요. 요양원에 남긴 방문자 기록을 보았더니 엄마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더군요."
"미주 씨는 왜 어머니에게 연락해 보지 않았어요? 궁금하지 않았나요?"
"전혀요. 그냥 모든 게 끝났으니까요. 엄마가 미란과 나를 버리고 떠나던 날, 그리고 미란이 죽던 날. 엄마와 나는 죽은 나무에서 떨어진 시든 잎이 되어버렸어요. 마르고 부서져 각자의 세상으로 날아가버렸죠. 우리 사이엔 아무런 인연도 남아 있지 않아요. 이제는 더 이상 엄마를 미워하지조차 않으니까요."
"정말 끝이군요.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이 도시는 미주 씨를 붙잡을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네요."
미주는 흠칫 놀라 연우 쪽으로 몸을 돌린다. 나무에 기대앉은 연우는 눈을 감은 채 옅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미주는 '당신이라는 힘이 나를 거세게 붙잡고 있잖아요. 이렇게.'라고 혼잣말을 한다. 마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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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는 미영의 고향으로 향한다.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집을 구할 생각이다. 마침 미영이 살던 고향마을에 오래된 빈집이 매물로 나와 있다. 조금만 손을 보면 둘이 살기에 충분한 집이다. 미주는 미영과 이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용한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징검다리를 뛰어넘듯 대충 살아보기로 마음먹는다.
'뒷일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자.'
미영 역시 미주가 구한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 거실에서는 바다가 내다보이고 마당엔 능소화가 한창이다. 바다에 맞닿은 하늘은 끝도 없이 넓고 높고 파랗다. 미주와 미영은 바다에 드리워진 한 점 구름이 되기로 한다. 미주는 햇빛이 세상을 요란하게 흔들어 깨울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뜨고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아닌 밥을 해 먹고 미영과 함께 산책을 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멩이나 조개껍데기 등을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병에 넣고 바닷물도 조금 담아둔다. 그러면 유리병 속에선 매일 다른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미주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노래가 멎으면 글을 쓴다.
미영은 그런 미주 곁에서 이따금 졸고 이따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밤이 되면 순한 양이 되어 잠자리에 든다. 둘은 바닷가 외딴집을 뒤집어쓴 소라게가 되어 낮이면 햇빛에 곪아터진 살을 조심스럽게 소독하고 밤이면 재빨리 집으로 숨어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하루는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도 시간은 바닷물에 띄워놓은 조각배처럼 둥둥 정처 없이 흘러간다.
"언니?"
오후의 햇살에 까무룩 잠이 들었던 미주는 화들짝 놀라 미영을 본다. 미영의 눈빛이 어쩐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미영의 눈에서 거센 파도가 한 차례 일렁이더니 눈부신 빛과 함께 부서진다. 미주가 알던 미영은 이제 세상에 없구나 하는 낯선 마음이 들자 미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미영아, 너 달라진 거 같아. 더 이상 네 눈에 어떤 외로움도 고통도 담겨 있지 않아. 아니 오히려 아름다워졌어."
"언니, 난 이곳이 내 생명의 원천이었어.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왔기에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아. 나는 해녀가 될 거야. 어릴 적 이 바닷가는 나의 놀이터였어. 아직도 모든 게 옛날 그대로인지 저 속으로 한 번 들어가봐야겠어. 나의 뱃속에는 더 이상 생명이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 채워진 기분이야. 이젠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언니는 그만 여길 떠나. 언니의 눈은 공허해졌어. 날 위한 희생은 여기까지면 충분해. 예전부터 언니를 놓아주고 싶었지만 언니는 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게 맹목적이었어. 그게 나라는 사람이 언니에게 해줄 몫이라면 부담스러워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언니를 살릴 차례야."
미영은 어느새 맨살을 드러내도 될 만큼, 더 이상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 않아도 될 만큼, 눈앞의 저 무시무시한 바다로 뛰어들어도 될 만큼 용감해져 있었다. 미주는 미영의 눈부신 환생에 감동한다. 이것이 미주가 살아온 내내 바라던 오직 한 가지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미주는 안다. 미주의 꿈은 미영도 미란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미주에게 주어진 생의 과업일 뿐이었다. 과업은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주는 미영의 말간 눈을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본다.
'그래, 미영아! 네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었어. 네가 꿈을 꾼다면 나도 이제 꿈을 꿀 수 있겠지. 고마워. 내 삶을 구원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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