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미주와 미영, 각자의 삶
미주 '숨' 카페로 향하다
다음날 아침부터 미영은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미주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미영은 조용히 일어나 마을의 해녀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갔다. 대부분 미영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어르신들이었기에 무리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미영은 할머니가 대부분인 해녀들 곁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자처했고 조금씩 물질을 배워 나갔다. 가끔은 미영이 가져온 전복이나 소라로 저녁을 해 먹기도 했다. 미영은 예전처럼 미주를 위해 이런저런 요리를 맛나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미영은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도시에 있을 때보다 활력과 생기가 넘쳐 보였다. 하지만 미주에게 시간은 여전히 멈춘 듯했고 변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었다. 미영은 그런 미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둘은 평소대로 바닷가 작은 집에서 함께 살았지만 각자의 삶을 향해 조금씩 몸을 돌리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다시 봄이 왔다. 오늘도 미주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순간 창문으로 하얀 눈송이 같은 것이 한 개 날아와 부딪히고는 사선을 그으며 아래로 주욱 떨어진다. 미주는 깜짝 놀라 마당으로 나간다. 벚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기억 속의 한 장소로 한순간에 내달음질을 친다. P작가와의 만남 이후 엉망이 되어 찾아간 그 새벽 아무렇지도 않게 벚꽃길을 함께 걸어주던 그, 잠든 미주에게 따듯한 라테를 먹이기 위해 쉬지 않고 라테를 만들어주던 그가 눈앞에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뒤덮으며 바닷가 집 안에 울려 퍼진다. 그러고 보니 미주는 아주 오랫동안 라테를 마시지 않았다. 벚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을 얼굴로 맞는다. 눈을 감자 흐릿한 라테의 향기가 미주의 온몸을 감싼다. 당장이라도 라테를 맛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하게 솟구쳐 오른다.
'미영아, 나 잠시 여행을 다녀올게. 벚꽃이 떨어지고 있거든. 오늘은 라테를 꼭 마셔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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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를 남긴 미주는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그 길로 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을 만나니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쥔다. 몸에 있는 힘이 손톱만큼이라도 빠져나간다면 도저히 도시로 나가지 못할 것만 같다. 어색함과 낯섦을 견뎌내려면 안간힘을 쥐어 짜내야 한다. 역에 도착해 보니 도시로 가는 기차는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하루 종일 빈 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미주는 역 앞의 작은 국숫집으로 들어간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잔치국수 한 그릇과 김치를 쟁반에 받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내온다. 멀리서부터 강한 멸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위가 상했지만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한 젓가락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입안에 국수가 한가득 들어가자 더 이상 후각은 작동하지 않고 조미료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이 미각을 사로잡는다. 오물오물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동안 귓가에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오랫동안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신문도 본 적이 없다. 미주는 자신이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죄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잔뜩 움츠린다.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니, 연예인들의 가십거리와 잡다한 풍문들에 대해 남자 둘이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소설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탄탄한 독자층을 누리고 있던 P작가의 충격적인 소식이 연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소설에 등장한 내용이 사실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었고 등장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실제 P작가의 제자들이거나 내연녀였다고 합니다. 특히 수많은 어린 여제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도 모자라 여러 차례 낙태를 시키기도 했다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사건으로 P작가의 작품은 앞으로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여론이 팽배해졌고 기존에 수상한 문학상들도 취소하거나 무효화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성범죄자인 P작가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고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을 반복해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왜 학생들은 교수를 고발하지 않은 건가요?"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유명한 작가이기도 했고요. 어린 학생들이다 보니 교수에게 맞서기가 두렵고 막막했을 겁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자발적인 성 상납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루밍의 방식으로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기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도 여자로서 두려웠을 거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 한꺼번에 폭로가 되었나요?"
"놀랍게도 P작가의 아내가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증거 자료와 함께 모든 언론사에 동시에 뿌리면서 이 일은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내 K 씨는 현재 P작가와 이혼 소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온 아내가 갑자기 돌변한 데에는 어떤 이유라도 있을까요?"
"아마도 작년 가을에 발표한 소설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그 소설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소설 속 여주인공이 유산을 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는데요. 공교롭게도 오랜 시간 아이가 없던 P작가의 아내도 그 시기에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K 씨 역시 유산을 하면서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K 씨가 용기를 내준 덕분에 그동안 어린 여학생들이 받은 고통과 억울함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미주는 텔레비전 화면에 꽂혀 있던 눈을 거두고 다시 국수를 입 안에 넣는다. 한 입, 두 입, 세 입 쉬지 않고 밀어 넣는다. 먹는 건지 마시는 건지 모르게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운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말끔히 마셔버린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웃는다. 옆 테이블에 있던 말끔한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미주를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주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잠시 P작가의 아내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 작디작은 여자가, 곧 소멸해 버릴 것만 같던 여자가 거짓의 성을 스스로 깨부수었다는 생각이 들자 미주는 크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 진다. 박수를 치듯 두 손으로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면서 발딱 몸을 일으켜 할머니에게로 간다. 국수값을 내면서 과하게 흥분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수였어요. 많이 파세요! 건강하시고요."
미주는 갑자기 역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다가가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기차에 오른 미주는 피식피식 혼자 웃다가 깜빡 잠이 든다. 그 사이 기차는 미주를 예전의 그 도시로 순식간에 데려다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이었다가 선이었다가 면이 되는 그곳. 미주는 심호흡을 하고 등에 멘 배낭끈을 두 손으로 다시 한번 단단히 틀어 쥐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은 미주와 미영뿐이다. 또 다른 미주와 미영들은 여전히 이 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다. 미주는 지하철을 탄다. 자다가도 용수철처럼 튀어 내리곤 했던, 본능적으로 이끌리곤 했던 그 역으로 향한다. 묘한 설렘과 떨림으로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친다.
'연우를 본다. 그리고 라테를 마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더는 생각할 수가 없다.
'숨'카페는 예전 그대로이다. 덜컹 카페 문을 밀어 여는 순간, 미주는 뭔가 달라진 공기를 느낀다. 그가 늘 앉아 있던 자리로 맨 처음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미주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연우가 아니다. 앳된 남자가 예의 손님에게 하는 친절한 어투로 인사말을 던진다. 미주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자기가 늘 앉던 자리로 눈길을 다시 돌린다. 다행히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아무 말 없이 자리로 가서 '라테'를 주문한다. 젊은 바리스타는 연우와 비슷한 솜씨로 '라테' 한 잔을 만들어 내온다. 하지만 연우의 라테는 아니다. 카페 이름도 그대로이고 인테리어도 그대로인데 바리스타만 바뀌어 있다. 어쩌면 저 앳된 남자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닐까 생각하며 미주는 라테 한 잔을 천천히 마신다.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면서 문자도 전화도 하지 않은 자신을 생각하니 한심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휴대폰을 집에서 나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낭 속에 욱여넣은 것을 떠올린다. 배낭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연우의 이름을 검색한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연우에게 말을 건네듯이 조심스럽고 떨리는 손으로 문자창에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한다.
'연우 씨, 나 미주예요. 오랜만이죠? 실은 라테를 먹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런데 바리스타가 바뀌었네요.'
미주가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 '띵동'하고 문자메시지 알림이 온다.
'미주 씨, 드디어 왔군요. 조금만 기다려요.'
연우다. 미주는 연우의 '기다려요.'라는 말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본다. '기다려요'라는 말이 아주 새롭고도 놀라운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간 미주는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미주가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