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주의 새로운 세계

'숨', 연우의 공간에 머물다

by 소위 김하진

미주에게 카페 '숨'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하는 공간이자 생의 가장 극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미주 삶의 한 세계가 문을 닫았다. 이제 새롭게 열릴 또 다른 세계를 목전에 두고 미주는 '숨'카페로 되돌아와 있다.


미주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파도 한 점 없는 정적의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에 서서히 잔 물결이 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담벼락처럼 높아진 파도가 미주 앞으로 덮쳐온다. 그 파도 속에서 미영이 헤엄을 치고 있다. 미주는 출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멀어져 가는 미영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순간 누군가가 미주의 손을 잡는다. 파도는 사라져 버리고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한 햇빛이 얼굴로 쏟아진다. 고개를 돌리니 미주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어린 여자아이이다. 아이가 햇살에 번져 녹아내릴 것처럼 희뿌연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미란이인 것도 같고 미주인 것도 같은 여자아이와 손을 잡고 말없이 걷는다.


갑자기 여자 아이는 연우로 바뀐다. 연우는 크게 웃고 미주는 조그맣게 미소 짓는다. 바다는 어느새 하얀 벚꽃이 가득 깔려 있는 순백의 길이 된다. 둘은 손을 꼭 잡고 벚꽃 무더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닥에 쌓여있던 벚꽃잎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날린다. 미주의 몸과 얼굴에 수천 송이의 벚꽃잎들이 부딪히며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연우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더 이상 보이지도 않는다. 미주는 텅 빈 손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벚꽃 잎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사방은 다시 정적의 바다와 투명하리 만큼 새파란 하늘이 가득 메우고 있다.



출처 Pixabay


미주는 빈 손을 간절하게 꽉 쥐어본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미세한 통증이 손 안으로 번진다. 놀란 미주는 눈을 번쩍 뜨면서 고개를 든다. 연우가 라테 한 잔을 앞에 놓고 미주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연우 씨, 언제 왔어요? 제가 고단했나 봐요. 잠깐 잠이 들었네요."

"멀리서 오느라 피곤했죠?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라테는 방금 전에 다시 만든 거예요. 따듯하게 한 잔 마셔봐요."

"엄청 오랜만인데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대하네요. 연우 씨는."

"하하하, 그런가요? 오래 만나지 못했지만 이 자리를 보면 미주 씨가 늘 여기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 제겐."


연우 대신 카페를 지키던 앳된 바리스타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카페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어둡다. 미주를 제외하고는 손님도 없다.

"아, 오늘은 영업을 일찍 끝냈어요. 미주 씨가 왔잖아요."

"실은 저는 단지 라테를 마시기 위해 온 거예요. 오늘 아침 벚꽃을 보았거든요. 일 년 전 그때 그 벚꽃이 떠올랐죠. 연우 씨의 라테를 마시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거 같더라고요."

"이렇게 와줘서 너무 기뻐요. 라테는 얼마든지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근데 이 도시엔 언제까지 머물 예정인가요?"

"그게, 제가 미쳤나 봐요. 무작정 왔어요. 당장 갈 곳도 없고 오늘 밤 잘 곳조차 없네요. 막차라도 타고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무슨 말이에요. 원하는 만큼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저 안쪽에 방이 하나 있어요. 혼자서 지내기엔 충분할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럼 오늘만 신세를 좀 져도 될까요? 곧 돌아가야죠."

"미주 씨, 이런 말 주제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용기 내서 할게요. 이제는 미주 씨도 미주 씨만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 스스로를 벌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까지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고 빌 만큼 빌었으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연우 씨 말처럼 이제부턴 다르게 살아야 할 거 같아요. 미영은 완전히 회복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제가 필요하지 않아요."

" '숨'에 머무르면서 생각해 봐요. 미주 씨만의 새로운 삶을!"


미주는 연우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자 자신이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가 된 듯하다. 이대로 세상이 멎어도 좋을 것만 같은 고요와 평화 속에서 한숨을 토해본다. 동시에 미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떠밀려 갈 때마다 알 수 없는 설렘과 흥분도 느낀다. '숨'은 미주에게 '정체와 격동, 고요와 불안, 파괴와 창조, 좌절과 희망, 소멸과 부활'이 뒤죽박죽 된 운명의 연옥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숨'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뒤에는 늘 '연우'가 있었다.


미주는 홀로 '숨'에 남는다. '연우'가 늘 앉던 자리의 뒤편을 보니 문이 하나 있다. 그 문 뒤에 평소 '연우'가 머물렀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는 방 하나가 있다. 일인용 침대와 책상, 작은 책장과 옷장이 가구의 전부이다. 공기 중엔 연우의 냄새와 커피 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몇 가지의 화학적 냄새들이 겹겹이 덧대어져 있다. 침대는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책상에는 읽다 만 책 몇 권이 펼쳐져 있다. 미주는 책상에 앉아 연우가 읽다 만 책들을 넘겨본다. 의학 서적들이 여러 권 있고 미주의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도 보인다. 책을 펼쳐보니 편집자 이름에 '고미주'라고 적혀 있다. 미주가 출판사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편집한 책이다. 책장을 휘리릭 넘기자 책갈피 사이에서 얇고 작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유영하듯이 천천히 떨어진다. 집어 보니 연우가 쓴 듯한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의 삶을 구제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일인가? 승리도 패배도 없는 잔인한 싸움에서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 구원이다.'


종이를 다시 책장에 조심스럽게 끼워 놓는다. 읽다 만 듯한 의학 책 한 권은 군데군데 접어 놓거나 밑줄 그어 놓은 부분들이 많다. 접힌 책장을 펼치니 '희귀 난치병'에 대한 부분에 형광펜으로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다.

‘2형 신경섬유종증’은 3만 5000 명당 1명 정도 발병하는 난치성 희귀 질환이다. 종양이 자라서 뇌간(척수로 이어지는 뇌의 뒷부분)을 누르면 생명에도 지장을 줄 정도로 치명적이다. 대개 20~30대에 발병하며 원인은 상염색체 우성유전으로 22번 염색체에 있는 종양 억제 유전자(NF2) 변이로 발생한다. 특징은 환자 대부분이 난청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 이명, 어지러움, 백내장, 보행장애, 근력 약화, 감각 이상, 통증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미주는 그 페이지를 오래도록 쳐다본다. '치명적, 이명, 어지러움' 등의 단어들이 눈앞에 커다랗게 확대되면서 미주의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맴돈다. 갑자기 숨이 콱 막힐 것 같은 불안이 미주의 머리를 삼켜 버리려는 듯 덤벼든다. 책을 덮어버리고 침대로 가 몸을 눕힌 미주는 연우가 남긴 쪽지의 '마지막 구원'이란 말을 계속해서 되뇌어본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꿈도 없는, 잠 속의 잠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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