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다시 미주와 연우

미주와 연우 손을 잡다

by 소위 김하진

눈을 떠보니 어느새 사위가 환하게 밝아 있다. 초저녁부터 잠들었으니 12시간 이상을 잔 듯하다. 미주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온다. 어제의 앳된 바리스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리스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미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사장님께서 쉬시는데 방해하지 말고 카페 문도 열지 말라고 하셔서 조용히 있었는데 혹시 저 때문에 깨셨을까요? 죄송해서 어쩌죠?"

"아니에요. 저는 충분히 많이 잤어요. 그리고 카페 문을 왜 닫아요. 빨리 여는 게 좋겠어요."

"네, 안 그래도 일어나시면 열라고 하셨습니다. 앉아 계세요. 라테 한 잔 가져다 드릴게요."

"고마워요."


라테를 마시면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본다. 어느새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하나 둘 눈에 띈다. 미주는 1년이란 시간이 이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다가 그대로 돌아와 멈추어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1년 전 미주와 지금의 미주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을 포개어 놓은 듯한 장막이 가로막고 서 있다. 미주는 창에 비친 과거의 미주에게 쓸쓸하고 아련한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미주의 눈빛은 이미 과거로 향한 문을 닫아버린 채 새까맣다. 미주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뒤돌아선다. 이제는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가벼워진다. 그때 마침 휴대폰 문자 메시지의 알림이 울린다.


'미주 씨, 일어났지요? 제호에게 들었어요. 이제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잠시 후에 갈게요. 기다려요!"


연우의 '기다려요'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미주는 자신이 언제나 여기에서 연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진다. 미주는 기다리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아마도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영혼을 저당 잡히는 일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후로 미주는 그 무엇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음식도 버스도 우정도 사랑도. 기다림이 예전보다 편안해진 자신을 보며 미주는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연우는 미주를 데리고 카페 옆 국밥집으로 향한다. 뜨끈한 국물이 미주의 텅 빈 속을 훑고 내려가자 갑자기 모든 게 낯설다는 느낌이 목구멍 위로 거북하게 치솟아 오른다. 몇 숟갈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미주 씨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예전보다 많이 야위었어요."


"어색해요. 이곳이... 이 도시가요. 떠나고 나니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어요. 저는 한 번도 이곳에 속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아니 어쩌면 사는 동안 그 어디에도 속한 적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전 오로지 '숨'에서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죠. 이상하죠?"


"제게도 '숨'은 그런 곳입니다. 미주 씨가 떠나고 저도 그 이유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어요. 아마도 제겐 어느 날부터 찾아온 한 여자가 그 이유였던 것 같아요. 집에서 뛰쳐나온 지 3년쯤 지났을 때였죠. '숨'을 연 지는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고요. 한 여자가 지친 표정으로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카페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앉더군요. 그리곤 라테를 주문했죠. 혼자 라테를 마시면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하고 한동안 멍하니 거리를 내다보기도 했어요. 근데 그날 이후로 여자의 방문은 점점 잦아졌죠. 늘 정신은 딴 데 가 있는 듯한 얼굴로 같은 자리에서 라테를 마시고는 돌아갔어요. 들어올 땐 피신이라도 하듯 황급하고 간절해 보였지만 나갈 땐 자포자기한 전쟁터의 포로 같았지요. 저는 혼자서 그 여자의 쿠폰을 찍기 시작했어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제가 쿠폰을 준 날을 기억하나요?"


"그럼요. 깜짝 놀랐죠. 연우 씨의 라테를 좋아하면서도 저는 '숨'의 바리스타에겐 무관심했었죠."


"저는 그저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미주 씨의 치열한 생을 지켜보았어요. 미주 씨는 단 한 발을 내딛기 위해 과거의 모든 삶과 사람들을 책임지면서 현실과 싸우고 있었죠. 언제나 용감했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했어요. 반면에 저는 비겁한 도피자일 뿐이었지요. 미주 씨는 내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의 진짜 삶을 살라고. 도망치지 말고 생의 파도에 아프게 부딪히고 부서지라고."


"그런가요? 사실 연우 씨는 제게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았는걸요. 우린 각자의 길 위에서 서로를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거군요. 어찌 됐든 연우 씨는 무척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간 건가요?"


"저는 의사가 되기 싫어서 떠난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부모님을 따라 최고의 의사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병이 시작되었어요.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의사로선 치명적인 결함이었죠. 저는 모든 게 두렵고 화가 나서 도망쳐 나온 거였어요. 스스로를 애써 속이면서 오랫동안 괴로워했지요. 미주 씨가 처절하게 생에 맞서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어요. 나도 이젠 제대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미주 씨가 떠나자마자 저도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치료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요."


"그랬군요. 그런 일을 겪으셨군요. 저는 연우 씨에게 늘 받기만 한 줄 알았는데 연우 씨 삶에 나도 무언가를 준 게 있다니 놀랍고 기뻐요. 근데 카페는 왜 아직 정리 안 하셨어요?"


"미주 씨가 돌아올 걸 알았으니까요. 미주 씨가 오면 이번엔 제가 도와주고 싶었어요. 미주 씨가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이곳에서."


미주는 어젯밤에 보았던 쪽지를 떠올린다. '구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누군가의 삶이 다른 이에게 구원이 되어줄 때가 있다. 미주는 미영을 도움으로써 미란에 대한 오랜 죄의식에서 벗어났다. 미영은 대가 없는 미주의 희생으로 두 번째 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연우는 미주의 용기와 책임감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세운 벽을 허물어낼 수 있었다. 이젠 연우가 미주에게 새로운 구원이 되어 주려 하고 있. 생이 절박할 때에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것이 결국 구원이 되기도 한다. 운명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의 벼랑 끝에서 서로에게 내밀고 잡은 손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이에게도 절벽 안에 서 있는 이에게도 마지막 구원이자 희망이다.


미주는 조용히 연우 앞으로 손을 내민다. 연우는 그 손을 가만히 잡는다. 서로에게 마지막 구원이 될 손을....


출처 Pixabay


* 저의 첫 단편소설 연재를 마칩니다. 처음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졌네요. 미흡한 초보 작가의 소설에 관심과 사랑을 가져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