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구가 된 미영
우리 같이 바다로 가자
미주는 긴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한다. 그러고 보니 집필에 매달려 있는 동안 미영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미영을 눈으로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자리로 가보니 책상이 이상하리만치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미영 씨 어디 출장 간 거예요?"
미영 옆 자리의 동료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미주 씨, 몰랐어요? 미영 씨 퇴사했잖아요. 두 분이 친해서 저는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미주는 미영에게 급히 전화를 건다. 미영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미주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으로 요동친다.
'미영아, 나 언니야. 어떻게 된 거야? 회사는 몇 달 뒤에 그만둔다고 하더니 왜 벌써 나간 거야? 언니가 그동안 바빠서 상황을 몰랐네. 미안해. 이 문자 보는 대로 연락 좀 줘.'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오전 시간을 보낸 미주는 점심시간을 틈 타 미영이 사는 원룸으로 향한다. 미영의 집은 출판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고장 난 현관벨은 눌러도 소리가 나질 않는다. 전화를 걸면서 현관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 보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어딜 가 있는 거야.'
회사로 돌아온 미주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몇 분 간격으로 쉬지 않고 미영에게 전화를 걸고 또 건다. 미주는 퇴근하자마자 '숨'카페로 향한다.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잠재워 줄 수 있는 건 연우의 라테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연우 씨, P작가와 동생이 여기 다시 오면 제게 꼭 알려줘요."
"왜요? 동생이란 분과는 연락이 되질 않나요?"
"네, 갑자기 회사도 그만두고 제 전화를 받지 않아요."
"이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글쎄요, 아무 일 없길 빌어야죠. 그래야만 하고요."
집으로 돌아온 미주는 밤이 되도록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다. 작은 창 밖으로 편의점 봉지를 든 젊은 남자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씻지도 못한 채 그만 잠이 들고 말겠지. 미주는 문득 하루 종일 자신도 굶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뱃속에서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허기에 컵라면을 찾아 물을 붓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태연하게 밥만 잘 먹더라는 어느 작가의 고백처럼 이 하찮은 몸뚱이를 보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귀한 것들을 외면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그것이 못내 부끄러워질 때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우는 것도 그만 다 멈춰버리고 싶지만 늘 용기가 부족하다. 허무를 압도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두려움보다 죄의식이 커지는 날이 오면 이 생을 그만 이별할 수 있을까. 컵라면을 휘휘 저으며 미영에게 전화를 다시 건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다. 기나긴 침묵이 미주의 가슴을 서늘하게 휘감고 돈다. 컵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려는 순간, 문자 알림음이 도착한다.
'미주 씨, 나 연우예요. 동생 분이 지금 카페에 와 있어요. 그런데 많이 안 좋아 보이네요.'
'그래요? 제가 당장 갈게요.'
미주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총알 같이 튀어 나가 택시를 잡아 탄다.
'미영아, 조금만 기다려 제발.'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면서 카페 문을 연 미주는 절규하듯 소리를 지른다.
"미영아!"
P작가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미영이 등을 지고 앉아 있다. 한 뼘은 작아진 듯한 미영의 어깨가 천천히 미주를 돌아본다. 바다와 같이 깊고 촉촉했던 미영의 눈동자가 어느새 사막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허한 눈빛이 미주를 보는지 미주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지 알 수 없다.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았어? 걱정했잖아."
"언니, 나는 고향을 떠나온 지 이제 십 년이 넘었어. 언니 알지? 내가 얼마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이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는 폐허 같은 곳이지만 돌아가고 싶었어. 거기에는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를 품에 안으면 불구가 된 나도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언니 알지? 뱃속의 아이가 나를 잠재우고 숨 쉬게 하는 바다였다는 걸 말이야. 외로움에 짓물러 한없이 곪아가던 내 영혼을 바스락 소리가 나게 말려 주던 따스한 햇빛이었어. 언니는 알지?"
"미영아?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이가 아빠에 대해 알아버렸어. 영원히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리고 말았어.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도 엄마, 아빠 목소리를 다 알아듣는다고 하더라.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에게 버림받은 거야."
"P작가를 만났구나? 그 사람이 네게 뭐라고 했는데?"
"언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겐 아이가 알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야. 버림받은 아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남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의 바다는 말라붙었고 태양은 져버렸어. 이제 나는 다시 예전처럼 썩어갈 거야. 영원히 불구가 되어 버리고 말 거야."
"미영아, 너 설마....."
입을 틀어막는 미주에게서 고개를 돌린 미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카페 문을 향해 걸어가는 미영의 치맛단으로 선홍색 핏물이 서서히 번져간다. 잠시, 미주와 연우는 미영의 뒷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미영이 주저앉으려 하는 순간 둘은 동시에 달려 나가 미영의 양팔을 붙잡는다. 이미 정신을 잃은 미영은 힘없이 목을 떨구고 발목 아래로는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피를 본 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미주가 날카롭게 소리 지른다.
"미영아, 정신 차려. 미영아! 연우 씨 미영이를 좀 도와주세요. 연우 씨!!"
연우는 희미해지던 눈빛을 거두고 미영을 등에 들춰 업는다. 미영을 업은 연우와 미주가 함께 거리로 달려 나간다. 미영의 피가 연우의 등을 적시며 길바닥에 뚝뚝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출처 Pixabay
응급실 침대에서 밤을 지새운 미주는 잠들어 있는 미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 바짝 야윈 가녀린 몸, 들릴락 말락한 옅은 숨소리. 미영은 유산을 했고 몸을 혹사시켜서인지 하혈이 멈추지 않고 있다. 미영의 얼굴에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미란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미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미영의 손을 꽉 잡는다.
"미영아, 미안해. 네가 임신했다고 말한 건 나였어. P작가가 아이를 외면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었나 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런데 미영아, 절대로 네 삶을 내려놓아서는 안돼. 내가 도울게. 네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말이야. 우리 같이 바다로 가자. 아직 너의 바다는 마르지 않았어. 미영아, 아이는 절대로 널 버린 게 아니야. 네가 잠자고 숨 쉬기를 누구보다도 바랄 거야. 아이에게도 너는 바다고 태양이었어, 미영아. 그걸 잊으면 안 돼."
미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듯 말한다. 미영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옮긴 미영이를 연우에게 잠시 부탁하고 미주는 병원 밖으로 나온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는 거리는 눈이 시게 푸르다. 감당할 수 없는 생기가 온 세상을 감싸고 있다. 미주는 순간 몸서리를 친다. 햇빛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느껴져 소름끼친다. 온몸이 가렵다. 여기저기를 긁어대던 미주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회사로 가는 지하철에 황급히 몸을 싣는다.
미주의 컴퓨터를 뒤지니 연락처 하나가 나온다. 한참 동안 신호가 울려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만 포기하고 끊으려 하는 순간, 전화기 너머로 한 여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OO출판사 고미주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신데요?"
"얼굴 보고 말씀드려야 할 일이에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꼭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세요."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