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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

아버지의 맛, 인생의 맛, 내겐 아직 어려운 맛, 그러나 좋아하는 맛

by 소위 김하진

말린 생강을 물에 넣고 팔팔 끓인 후 꿀 한 스푼을 탄다. 얼얼하고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을 감돌다 목구멍을 뜨겁게 지지면서 몸속으로 타고 들어간다. 나는 매운 것은 뭐든 다 좋아한다. 청양고추도 좋고 고추냉이도 좋다. 매운맛은 통각이라고 한다. 변태스러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고통이 혓바닥을 자극하면서 바늘로 입안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그 느낌이 좋다. 매운 것을 먹으면 온몸이 따뜻해지고 정신이 더없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매운맛이 없다면 사는 동안 먹는 즐거움은 더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매운맛을 좋아하는 나는, 뼛속까지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의 딸이다.


아버지는 지독할 정도로 매운맛을 즐겼다. 웬만큼 매운 것은 매운 것으로 치지도 않았다. 냄새만 맡아도 매운 내가 훅 끼치는 청양고추를 땅콩이라도 씹듯이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그것도 그냥은 심심하다고 고추장에 푹 찍어서! 아버지 입에서 나던 아삭아삭 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내 입안에는 침이 한가득 고인다. 어린 시절 나도 아버지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매운 고추를 먹어보고 싶었다. 이건 덜 매울까? 저건 어떨까? 고추들의 자태를 요리조리 만져보고 비교해 보고 나서야 신중하게 하나를 골라 베어 물었다. 하지만 한 입, 두 입, 세 입쯤이면 어김없이 고통의 수위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고추 하나를 끝내 다 먹지 못하고 포기해 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며시 아버지 밥그릇으로 먹다만 고추를 들이밀었다. 아버지는 그 고추를 참 맛있게도 받아먹었다.


정말 안 매워?

안 매워. 이게 뭐가 매워? 맛있으니까 매우면 아빠 다 줘.


나는 고추를 하나씩 집어 들고는 꽁지 부분만 베어 먹다 말았고, 아버지는 내가 남긴 '좌절과 포기'를 야금야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었다. 그렇게 고추 하나에 담긴 매운맛과 인생의 매운맛을 우리는 깔끔하게 나눠 먹었다.


아버지는 짜장면에도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서 빨갛게 비벼 먹었다. 짜장면인지 고춧가루면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새였다. 그게 또 어린 마음에 괜히 멋져 보였다. 한 번은 나도 아버지처럼 고춧가루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입안에 들어온 그 음식은 더 이상 짜장면이 아니었다. 달콤 짭짜름한 맛과 느끼하고 기름진 맛이 조화를 이루며 면이 후루룩후루룩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매캐한 맛이 단짠단짠의 리듬을 불쾌하게 깨뜨려 버렸고 고춧가루들이 입안에서 까끌까끌하게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하는 통에 면이 잘 넘어가지도 않았다. 고추기름을 사용한 사천 짜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고춧가루를 듬뿍 뿌린 짜장면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고춧가루 짜장면에는 매운맛에 대한 아버지만의 유난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어른이 되자 나도 매운 것들을 곧잘 먹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건강한 위를 물려받지는 못했다. 허구한 날 응급실 신세를 지던 내게 매운 음식은 점점 멀리 해야 할 금기가 되어 갔다. 이젠 젊을 때처럼 화끈하게 매운 걸 즐기지는 못한다. 불닭볶음면도 엽기떡볶이도 그림의 떡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지향은 매운맛이다. 집안에 쌀은 떨어져도 청양고추가 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매운 것을 먹거나 매운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온몸에 있는 물이 한꺼번에 얼굴로 모여드는 것만 같다. 콧물도 나오고 땀도 나고 급기야 눈물까지 난다. 매운맛은 물을 부른다. 메마른 내가 촉촉해진다. 매운 것을 먹으면 심장이 뜨끈하게 데워지면서 온몸에 후끈한 열기가 오른다. 서리처럼 냉한 내가 따뜻해진다. 가슴은 몽둥이에 맞은 듯 얼얼하고 뱃속은 풍랑이 일어난 것처럼 출렁거린다. 매운맛은 멀미를 나게 한다. 그런데 그 울렁거림 속에는 묘한 설렘이 있다. 먹을 땐 괴로워하면서 돌아서고 나면 금세 그리워진다. 매운맛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애인 같다. 돌처럼 딱딱한 내가 말랑말랑해진다. 매운맛처럼 매력적인 게 세상에 어디 있을까?


매운맛은 나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고향의 맛이다. 청양고추 하나를 고추장에 푹 찍어 소주 한 잔과 함께 먹던 아버지의 맛이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 흉내를 내고 싶은 날이 올 것이다. 어린 날의 나처럼 호기롭게 덤볐다가 금세 포기하고 말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남긴 고추 반 꼭지와 술 반 잔을 '이게 뭐가 매워' '이게 뭐가 써'하며 받아먹을 것이다. 아주 맛있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하면서. 만약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내게도 아버지처럼 고통이 아프지 않을 날이 올까? 인생의 매운맛을 별 거 아니라며 비웃을 날이 올까? 나는 아직까지도 청양고추 하나를 끝까지 다 먹지 못한다. 그러니 그리 되려면 한참 멀었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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