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한 회색의 아버지
꿈에 온 아버지를 생각하다
연한 회색의 아버지
소위
연한 회색 셔츠에
연한 회색 바지를 입고
연한 회색 장갑을 낀
아버지가 연한 회색빛 얼굴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왔는데 왜 그러느냐?"
"뭔가 이상해요. 온통 회색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셔츠에 꽃무늬도 있네요?"
"가장 세련된 옷을 입고 왔는데 왜 그러느냐?"
어젯밤 긴 침묵을 깨고 아버지가 왔다.
알 수 없는 기이한 옷차림의 아버지를,
아니 옷을 한참 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왜 회색으로 온 것일까?
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회색은 조용함, 무(無)등을 연상시키는 색으로
자발성이 없는 무의미한 색이고 애매모호한 성격을 나타낸다.'
애매모호하다.
무의미하다.
아버지의 방문은 애매모호하고도 무의미한 것이었나?
'밝은 회색은 지성, 고급스러움, 효율성 등을 상징하며,
어두운 회색은 침울, 진지함, 퇴색 등의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는 연하디 연한 회색
가까이 봐야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 있는 은회색이었지.
아버지는 지성, 고급스러움, 효율성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차림이 그리도 어색했나 보다.
살아생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회색을
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친친 두르고 있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는 본디 연하디 연한 회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되면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겉옷과 바지를 벗어 버리고
온몸을 정화하듯 깨끗이 닦아낸 아버지는 혼자서 바둑을 보았다.
기원에도 한 번 나가지 않고 바둑알 하나 사들이지 않으면서도
하루 온종일 바둑 TV만 보았다.
'왜 저럴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둑이 싫었다.
우리 집에서 바둑은 TV 화면 속에 펼쳐지는 또 다른 세상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끝내 바둑을 집으로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연한 회색 양복 차림의 아버지가 결혼식장에 나타났었지.
아버지는 정말로 연한 회색을 좋아했던 것일까?
살아생전 딱 한 번 보았던 연한 회색의 아버지.
나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버지
막노동을 하면서 흙투성이가 되곤 했던 아버지
하루 종일 질리지도 않는지 바둑 TV만 보았던 아버지
외동딸의 결혼식에서야 당신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던 연한 회색 양복을 단 한 번 입어본 아버지가
저 생에 가서는 연한 회색을 있는 대로 마음껏 두르고 있구나.
어젯밤 오랜 침묵을 깨고
연한 회색이 되어 있는 나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연하디 연한 회색빛 웃음을 띠고.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