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의 반지를 팔았다. 더는 반지를 끼고 다닐 수도 없다면서 팔아야겠다는말을 먼저 꺼낸 건 엄마였다. 처음엔 그냥 놔두라고 말려도 봤지만, 이미 굳어버린 엄마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거동이 힘든 엄마를 대신해 내가 반지를 가져다 팔았다. 겨우 백만 원 남짓한 현금이 수중에 들어왔다. 막상 팔고 나니 허무하기 짝이 없는 액수였다. 오랜 세월, 엄마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을 예쁘지만 쓸모없는 금붙이들이 백여만 원의 지폐가 되어 내 손에 쥐어졌다.
응급실 한두 번, 아니 입원 한 번이면 없어질 적은 액수였다. 엄마는 두 달 만에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병원비를 쓰고 있으니 사실 돈이 된다면 그까짓 반지쯤은 팔아도 그만이었다. 통장잔고를 보며 병원비 걱정을 하는 우리에겐 백만 원이 그리 작은 돈도 아니었다. 끼지도않을 반지를 구석에 박아두고있기보단 당장에 엄마를 위해선 돈으로 바꾸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거였다.
그런데 엄마는 반지 판 돈의 절반에 가까운 오십만 원을 다시 내게주었다.그러면서 느닷없이 맘에 드는옷을 좀 사 입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옷은 필요 없어. 사지 않을 거야. 이 시국에 병원비로 써야지 돈을 그런 데 왜 써?"
"옷 사기 싫으면 그냥 네가 필요한 데 써. 반지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영 너는 끼지 않을 거 같아서 팔아서 주는 거야."
"병원비가 급하지 다른 게 뭐가 중요해? 병원비 통장에 넣어 놓을게."
"아니야. 잔말 말고 그냥 네가 가져."
나는 그 자리에서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돈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정말 대책도 없지. 이 돈으로 옷을 사면 뭐 해? 병원비 떨어지면 결국 빚을 내서라도 돈을 구해야 하는데 엄마 마음 편하자고 내게돈을 줘 봤자 뭐 하냐고!'
병간호로 지친 내게 한약을 지어먹으라고 준 돈도 그대로 통장에 넣어두었다. 만약에 병원비가 급해지면 그때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약을 지어먹지 않겠다는 내 말에 자기 성의를 무시하지 말라며 노발대발했지만, 나는 죽어도 그 돈을 쓰지 못하겠다.
죽음을 준비하는 엄마가 준 그 돈을.
엄마는 치장하기를 좋아했다. 옷도 화장품도 아끼지 않고 사던 엄마였다. 지금처럼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에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집에 갔더니 불과 며칠 전에 응급실에 다녀온 엄마가 눈썹 문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젊은 나도 하지 않는 걸 하고선 좋아하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아프다는 사람이 참 별 걸 다하네 싶어 속으로 비난도 했었다. 화장대에 가득한 화장품들, 옷걸이에 걸린 새 옷들. 그런 것들이 우리처럼 가난한 집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래도 엄마는 꿋꿋이 자기를 가꿨다. 그때만 해도 내가 돈을 벌어 병원비를 대던 시절이니 어찌어찌 가능한 모양이었다. 나는 종종 엄마가 입지 않는 옷이나 신지않는신발을 얻어와 억지로 입고 신었다. 그것도 엄마가 많이 아프면서부터 얻어올 수 있었지 엄마는 자신이 쓰던 것조차 물려주는 법이 없었다. 옷 한 벌, 화장품 한 개, 신발 한 켤레조차사주지 않던 엄마였다. 중고등학생 시절, 마땅한 외출복이 없던 나는 엄마가 어디에선가 얻어온 모 기업의 홍보용 티셔츠를 입고 나갔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왜 그렇게 내게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주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교복이 있는데 옷이 왜 필요하냐며 반문하던 엄마였다. 그랬던 엄마가 아끼던 반지를 판 돈으로 내게 옷을 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주는 돈이 그다지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다. 빈털터리가 되어 당장에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때도 심지어 결혼을 할 때도 만 원 한 장 보태준 적이 없는 엄마였다. 그래서일까. 엄마가 주는 돈이 낯설고 이상하고 불편하다가 어느 순간 미치도록 슬퍼진다.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내겐 당연하지 않아서 멀미하듯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제라도 딸을 챙겨주려 해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왜 이러냐며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머리를 뒤흔들다가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목부터 가슴 언저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자꾸만 쉭쉭 찬바람이 불어닥쳐서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이 끝 간 데 없는 고통의 원인은 '죽음'이다. 한때는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던 엄마가, 한때는 벗어나고 싶다고 넌더리를 치며 증오했던 엄마가 정말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엄마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나날이 내 숨통을 더 바짝 조여 오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유난을 떠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싶어 화가 나다가도, 정말로 죽음이 하루아침에 쓰나미처럼 밀어닥칠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귀한 목숨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예견하고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죄스럽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이 모든 혼돈으로 인하여 나는 끝내, 고통스럽다.
받았어야 할 사랑, 하지 말았어야 할 희생. 나는 평생 이것들에 대한 이기적이고 얄팍한 계산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모든 걸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한 편으론 왜 그래야만 하냐며 부질없는 반항을 해왔다. 나는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연기하면서 그럴듯한 자신의 연기력에 잘난 체해왔던, 비겁한 냉혈한일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엄마의 다정함이 이토록 어색하고 불편한 것인가? 왜 사랑을 부정하고만 있는가? 그것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래 굶주린 영혼의 분노와 억울함 탓일 것이다. 엄마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비난하고 응징하고 싶었던 나의 민낯을 이제 와 속수무책으로 들켜버리는 게 억울해죽겠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엄마의 가난한 사랑을 탓해왔건만, 나 역시 지독히 가난한 사랑을 해 온 딸인 것이다.
엄마의 여생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의 어떤 순간보다도 깊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 마치 살갗을 한 겹 한 겹 얇게 벗겨내듯 내면에 숨어 있던 나를 만나는 과정이 미칠 듯 쓰라리고 아프다. 나의 사랑이 그리고 나의 증오가 마침내 어디를 향해 갈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엄마가 결국엔 죽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