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에서 만난 과테말라의 시간

by Elizabeth Kim

나이아가라에 터를 잡고 현지 여행 작가로 살아가다 보면, 매일 같은 폭포를 보면서도 늘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날 아침 투어에서 만난 분들이 '과테말라에서 온 모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머릿속 지구본이 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여행서에서나 보던, 멀고도 신비로운 나라였기에 나이아가라에 살면서 과테말라에 거주하는 분과 하루 종일 여행을 함께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연은 늘 예고 없이, 우리의 치밀한 여행 일정표 바깥에서 훅 들어온다.




20대의 배낭이 50대 인생이 되기까지


엄마는 쉰 살이다. 25살, 젊고 가벼운 마음으로 과테말라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결국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여행이 삶이 되어버린 사람. 잠시 스쳐갈 줄 알았던 나라에서 25년을 살아낸 사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할 만큼 오래된 문장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은 자주 예정보다 멀리 가고,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낯선 곳에서 자신을 키워낸다. 돌아올 줄 알았던 길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타향이라 부르던 장소를 어느 날부터는 집이라고 부르게 되는 순간이 있다.




도깨비를 찾아 헤매는 소녀 같은 엄마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딸의 진학이라는 분명하고 진지한 목적 뒤에 숨겨진 그녀만의 작고 소중한 로망이었다. "도깨비 드라마 정말 좋아해요. 퀘벡 가면 그 빨간 문이랑 언덕길 꼭 가보고 싶어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은 50대도, 과테말라 이민자도 아닌, 그저 한 편의 드라마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처럼 반짝였다. 머나먼 과테말라의 뜨거운 일상 속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익숙한 언어와 그리운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그 시간들을 떠올리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어떤 순간에는 딸보다 더 맑게 웃었고, 어떤 장면 앞에서는 사람들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오래도록 풍경을 바라봤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한 '어떤 마음을 놓지 않고 살아남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녀 안에는 여전히 머나먼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 들어갔던 스물다섯 배낭여행자의 설렘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25년을 살아낸다는 건 결코 낭만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치열함이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체화하고, 수많은 관계의 부딪힘을 견디고, 사무치는 외로움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도 나를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던 시간들. 때로는 억척스러운 이방인으로, 때로는 강인한 엄마로, 때로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자신만의 자리를 차근차근 구축해 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 긴 여정을 마치 어제 동네 카페에 다녀온 이야기처럼 담담히 말했지만, 그 평온함 너머로 나는 오랜 비바람을 견뎌낸 나무에게서만 볼 수 있는 단단한 나이테를 보았다. 잘 살아낸 사람의 얼굴에는 유독 조용하고 깊은 빛이 있다. 그녀에게서 바로 그런 빛이 보였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낸 삶의 오버랩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내 삶이 자꾸 겹쳐 들어왔다. 우리가 살아온 나라와 시간은 다르지만, 낯선 땅에 닻을 내리고 살아가는 이방인이라는 이름표가 우리를 깊은 공감으로 묶어주었다. 꼭 국경을 넘어야만 타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익숙했던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던 순간, 이전의 나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새롭게 적응해야 했던 시간, 아무도 대신 건너줄 수 없어 끝내 혼자 건너야 했던 마음의 강. 그런 날들을 떠올리면 나 역시 오래전부터 내 방식의 타향을 지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툭툭 던지는 말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내가 잊고 지내던 내 안의 문장을 누군가 대신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처럼 뭉클하게 다가왔다.




엄마는 젊은 날의 우연한 배낭여행으로 삶의 물길을 완전히 바꾸었고, 딸은 이제 자기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토론토 대학, OCAD, 퀸즈 대학을 차례로 탐방하고, 퀘벡으로 넘어가 도깨비의 장면들을 하나씩 수집해갈 것이다. 한 사람은 이미 치열하게 건너온 시간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앞으로 찬란하게 건너갈 시간을 설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삶은 가끔, 지구본의 가장 먼 두 지점을 슬며시 이어 붙여 한 장의 사진 안에 넣어버린다. 그날 찍힌 사진들 속에는 폭포와 무지개만 있는 게 아니라, 과테말라의 25년, 나이아가라의 현재,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딸의 미래가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브런치스토리의 빈 화면을 열었다. 오늘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의 다음 장면은 어쩌면 이미 누군가의 비행기표 위에서, 누군가의 예약 리스트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과테말라에서 온 모녀와 함께한 나이아가라의 하루는, 삶이 우리를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 방향으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준 시간이었다. 타향에서 타향을 알아본 우리의 짧은 동행을 마음에 담으며, 나는 벌써부터 내일 만나게 될 또 다른 낯선 인연이 기다려진다. 여행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고이지 않고 흘러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