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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빠 Jan 30. 2018

#6. 유령 애인

참 불쌍했다. 가정이 있는 유부남의 내연녀도 아닌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니... 내 친구 D는 가엽고 불쌍하고 딱했다.

D는 사내 연애를 했다. 회사 내에서 연애하면 절대 안된다라는 금기 조항도 없었고, 둘 중 한 명이 퇴사해야 한다는 계약내용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사귀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같은 부서가 아니어서 다행인 점도 있었지만, 불행인 점도 많았다.

"이봐 D, 요즘따라 자주 본다? 우리 부서 같아?" 라는 농담섞인 말을 듣는 것도 한두번이지, 점점 그들의 시선이 불편해져서 회사 안에서는 아는 척도 안하고 스쳐지나가는 일도 많았다고 했다.

남들 다 하는 프로필사진조차 커플 사진으로 해놓은 적이 없었다.

"D, 남자친구 있다면서 얼굴 한번도 안보여준다? 남자친구 있다는 거 뻥 아니야? 주말에 나랑 영화나 보는거 어때?" 시시껄렁한 노총각 선배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나 남자친구있다고!'하면서 화를 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한번은 둘이 같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회사 사람이 목격한 적이 있었다.

회사 안에서 친하게 지내는 남녀가 버스를 같이 탈 수도 있지... 하지만,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었다고.

어느 날 D는 비밀 사내 연애는 할 게 못된다고 독기오른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용은 이랬다.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한 한 선배가 D의 남자친구에게 "둘이 사귀는 게 아니라면, 이번 주말에 소개팅에 나가라. 안 나간다면 둘이 사귄다고 확신할 거다"라고 반협박을 했고, 결국 D에게 거짓말을 하고 소개팅에 나갔다는 것이다.

"와,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자의 촉은 무서운거야. 주말에 갑자기 바쁘다고 못만나겠다더라고. 그냥 대뜸 '그 여자 만나니까 좋아?'라고 던졌는데 어버버하더라. 당황하는 게 이상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실토하더라. 너무 화나서 헤어지자고 했는데 벌써 3년넘게 사귀었는데 어떻게 또 헤어져..."

그날 D는 최대한 화를 내는 것으로 헤어짐을 대신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사귀다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헤어졌다. 또 한번의 비참한 사건이 D에게 벌어졌다.

평소 D의 살갑지 못한 성격과 말투에 불만을 가졌던 같은 부서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D에게 난동을 피운 것이다. 그 충격에 D는 병원신세까지 졌다.

속상했던 D에게 그의 남자친구는 비수를 꽂았다. "평소에 어떻게 행동했으면 같은 부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겠니? 너랑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대표실에 갔다왔다. 이번 사건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걸 나한테 설득해달래. 지금 너와 너의 상사 두 사람의 문제가 나한테까지 피해로 번진거 알고 있니?"

불쌍한 D...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상사에게 아부하지 않았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는 것.

본인이 맡은 일은 척척 해내었으며 일적인 것으로 꼬투리 잡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대뜸 하는 소리가 '너 때문에 나까지 피해본다'라는 말이라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피해를 볼거 같으니 일 커지지 않게 회사를 관두라고 종용까지 했다.

억장이 무너졌을 불쌍한 D... 잘다니던 회사를 그 한마디에 때려치고 말았다. 남자친구와 그때 단칼에 헤어졌느냐고? 단칼은 아니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남자친구의 얼굴 위로 그 말이 텍스트처럼 떠오르고 떠올라서 천천히 마음정리를 했다.

어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가 맞았다는데 여자친구가 잘못했다고 나무라겠는가! 친구인 나조차 당장 달려가서 그 상사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는데 말이다.  

D는 마지막으로 그 남자를 만나 편지를 전해줬다.

"잘 지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몇년을 참을 수 있던 건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런 너가 나에게 '앞길을 막는 존재. 피해를 유발하는 존재'라고 말했을 때 나는 정리를 시작했던 것 같아. 너는 늘 이기적이었지. 다른 누군가에게 떳떳하고 싶어 안달나있었으면서 정작 여자친구한테는 떳떳하지 못했던 거 인정하니? 회사생활 잘해라."

얼마 후 D는 보란듯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다정한 연인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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