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중학교 1학년, 사춘기 가득한 날 리안(가명)을 만났어요. 저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어요.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그런 곳있잖아요. 작은 도시다 보니 무엇이든 한박자 느렸는데요.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우리는 두발규정이 있었고 제 친구는 머리 숱이 아주 많았죠. 머리숱이 많은 아이의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 포도송이처럼 머리가 잔뜩 부풀어 오르는데, 제 친구도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 종종 이 친구를 포도알이라고 놀렸어요. 동그라미로만 제 친구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당시 친구를 그렸어요.
리안은 모두가 좋아하는 친구였어요. 당차게 해야할 말을 해야하고, 예의는 깍듯이 지키는 친구였고. 심지어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고 정의로웠어요. 치기와 패기가 넘치는 그 나이에 우리에게 얼마나 멋있어보였겠어요. 여전히 반짝이는 친구지만, 그 시절 향수처럼 그 모습이 남아요. 그러다보니, 리안은 괴롭히는 친구가 없었어요. 오히려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리안의 눈치를 보았거든요. 그때 리안은 저에게 '나다움으로 살아가는 힘'을 알려준 친구에요. 세상의 기준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알려줬어요.
오늘 이 글은 리안의 카페에서 쓰는 중입니다.
이름 : 리안
나이 : 29
MBTI : ENFJ
직업 : 카페사장님
첫만남 : 중학교 1학년 때 같은반 단짝
포지션 : 베스트프렌드
최근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뒤늦은 후폭풍이 왔을 때, [전남친한테 연락하고 싶은데 어떡해?] 라고 리안에게 메세지를 보냈어요. 짧게 한마디가 왔어요. [너 하고싶은대로 해]
삶에 크고 작은 질문과 고민이 생기면 꼭 리안을 찾아가요. 그럴때면 어김없이 리안은 "너 하고싶은대로 해." 라고 말합니다. 리안은 자기 자신을 대하듯 저를 대해요. 어떤면으로는 이렇게 성의없는 답을 주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간의 리안에게 그것이 최선의 답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그런 답을 주더라고요. 때때로 정말 모르겠을 때는 침묵으로 답을 합니다. 정말 모르겠다는 말이죠. 확실하지 않을 때는 답을 주지 않는 친구지만, 편견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덤덤하게 툭 던지는 한마디가 저는 좋더라고요. 진심을 담은 한마디는 열마디의 위로보다 힘이 돼요. [너가 마음이 이끄는대로 해, 그게 답이잖아.]
리안은 종종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그녀의 인간관계에서 제가 생존했음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요. [내 번호야 저장해] 이번에는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인간에 대한 혐오를 잔뜩 얻어왔을까요. 리안은 용기있고 강하고 똑부러지는 정말 멋있는 친구에요.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워요. 한없이 스스로를 열어주다가 혐오를 얻어오는 느낌이랄까요. 리안을 보다보면,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때때로는 무례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발견하게 돼요.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던 리안은 최근 혼잣말처럼 자주 이런 말을 던져요. [난, 한번 아니면 아니야. 두번 볼 필요가 없더라고.]
어쩌면 너무 친절한 친구를 보호하는 주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내친구에게 두번 봐도 괜찮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오면 좋겠어요.
(혼잣말) 나는 말이지, 수많은 리안의 인간관계 정리해고에서 무려 15년간 살아남은 사람이야.
2015년이었을거에요. 리안에게 힘든 일이 끊임없이 찾아왔어요. 저는 대구, 리안은 서울에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이 울상이더라고요. 구구절절 말하는 친구가 아니라서 표정을 보고, 그간의 상황을 듣고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서 리안에게 말했어요.
"모든 짐을 너가 다 견디려고 하지마. 그럴 의무는 없어."
그리고, 2개월 뒤에 리안에게 연락이 왔어요. [나, 제주도로 한달살이 하러 갈거야.]
너무 기뻣어요. 드디어 짐을 조금 내려놓았구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구나 말이에요. 그 때 가장 오랜시간 리안과 멀어졌어요. 한달 가기로 했던 제주도는 6개월을 머물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치앙마이로 한달살기를 하러 바로 떠났거든요. 돌아온 리안은 한뼘 더 단단해지고, 여유를 안고 돌아왔어요. 그리고 패션MD로 자신 다운 일을 시작했어요. 여전히 그녀는 강했고, 빛나고 있었어요.
작년 가을 즈음이었어요. 정말 뜬금엇이 메세지 하나가 왔어요. [보고싶어! 언제볼꺼야?] 이상하게 저는 리안이 찾아주면 기분이 좋아요. 든든한 친구가 된 느낌이랄까. 에헴. 그리고 저는 리안에게 언제나 시간이 있는 친구이고 싶어요.
[응. 근데, 나 말고 너가 더 바쁘니까 되는 시간 말해죠.]
문래동 카페 탁상 위에 리안은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과감없이 늘어놓았어요. 카페를 창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어렵게 올라온 서울에서 다시 지방으로 갈 생각에 답답한 이야기, 다른 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한아름 고민을 안고 있더라고요. 제가 리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특별하게 없었어요. 그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응원과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정감을 조금은 얻어가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요. "너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분명 최선일거야. 너는 생각보다 무엇이든 잘해내는 사람이고, 잘해낼 고민을 하는 사람이니까." 응원을 마음담아 전했어요.
그렇게 한달 뒤 전화가 왔어요. "나 결정했어. 다음 달에 지방으로 내려갈거야. 여고 앞에 카페를 열 예정이고, 3월에 오픈해. 그때 놀러와." 리안은 그런 친구에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다하고 묵묵해요. 유난스럽지도 않고, 경솔하지도 않아요. 침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고민하고 결정해요. 오랜시간 저와 리안을 지켜본 엄마는 그렇게 종종말해요. "네가 리안이랑 뭘 한다고 하면 걱정이 안돼. 그렇게 야무진애가 또 어딨겠어. 난 리안이가 참 좋다~"
리안에게.
흔들리고 길을 잃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는 리안아, 10대에 만나 이제는 30대를 바라보고 있어. 마음에 커다란 결정을 하고 너만의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마 너는 많은 두려움과 고민이 있었겠지만, 나는 너무 설레더라. 어떤 색과 모양을 담아서 너만의 일을 해낼까 말이야. 또 네가 만나는 카페 손님들에게 어떤 가치를 줄까 하면서 기분이 좋았어. 너의 모습에는 알 수 없는 행복이 서려있어서 걱정을 잊게 만들기도 하고,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고 그래. 돌아보면, 네가 머무는 곳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오늘 너의 카페에 앉아 하루종일 손님들을 보니 역시, 카페도 주인을 닮는 것 같아. 커피도 그렇고 네가 만든 디저트도 그런 것 같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의 표정도 너를 닮았어.
삶이 언제나 공평하지도 내 맘 같지도 않지만, 삶은 내가 살아온 날의 거울과 같다는 생각도 하게 돼. 그러니 너의 날은 언제나 안전하다. 모든 혼돈의 29살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보다 친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