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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Jun 26. 2022

국가의 경계, 연극의 경계

연극 <보더라인>, <자본 2>, <정글>

 오늘날 국경을 넘는 것은, 이제는 ‘마음껏 넘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일상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도 비행기 한 번만 타면 간다는 세상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난민 수용에 대한 열띤 논쟁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진행 중이다. 뉴스를 틀면, 누군가는 코로나 사태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 한다 아쉬움을 토로하고, 누군가는 또다시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힘쓰는데, 누군가는 국경을 넘지 못해 바다에서 죽는다. 새삼 ‘국경’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에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은, 2015년 시리아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오던 다섯 살 배기 아이의 시신이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직후부터였다. 현재에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에서, 다양한 매체는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매체 속 충격적인 이미지로만 접했을 때, 사람들은 난민의 입장에 공감하며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나 자신이 속한 나라에 난민을 수용하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될 때, 즉, 이미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눈앞의 문제가 될 때, 사람들은 거부감을 표한다. 이때의 국경은 또다시 넘을 서로를 구분 짓는 굳건한 장벽이 된다. 그들과 나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 듯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경우들을 바라보며 국가는 무엇이고, 국가를 나누던 ‘경계’는 어떤 의미이고, 그 안에, 또 밖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연극계에서도 국경이라는 ‘상대적인 개념’과 난민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2020년과 2021년에 공연된 극단 ETS의 <정글 (The Jungle)>은 칼레의 난민촌 내부와 외부에서 체감하는 국경에 대해 다룬다. 2021년과 2022년 공연되었던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 21의 <자본 2>는 전 세계 슈퍼리치와 시리아 난민이 각각의 경제적 위치에 따라 체감하는 국경에 대해 다룬다. 두 작품은 각각 2021년, 2022년 서울연극제에 나란히 초청되었다. 2020년 서울 국제 공연 예술제(SPAF)에서 독일 실황 영상으로 소개되었고, 바로 그 다음 해 한국에서 공연되었더 크리에이티브 VaQi의 <보더라인>은 자라온 국가의 역사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국경에 대한 개념을 다룬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연극 <보더라인>, <자본 2>, <정글> 의 포스터이다.


 세 작품은 내용상 경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각각 ‘연극인 것’과 ‘연극적이지 않은 것’, ‘무대 위’와 ‘무대 밖’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보더라인>과 <자본 2>는, 두 연극은 각각 객관적인 자료 제시와 극화를 넘나들며 지금까지 관객이 가지고 있었을 ‘연극’이라는 범위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글>의 경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기를 꾀하며 관객이 경계를 두고 관찰하던 행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세 작품은 모두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가진 경계의 자의성을 체감하게 만든다. 물론 세 작품이 모두 경계를 넘는 것에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보더라인>과 <자본 2>는 경계의 한 쪽으로 치우친 듯한 어색함을 보이고, <정글>은 형식이 관객에게 온전히 녹아들지 어색함과 극장의 한계, 관객이 가진 사전지식의 한계가 보였다. 그럼에도 내용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경계의 자의성을 이야기하며 관객의 ‘체감’을 이끌어내려 했다는 시도는 인상 깊다. 작품을 통해 이제껏 흔히 여러 매체에서 보여준 ‘관찰’의 한계를 답습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성과 극화 사이다소 치우친 어딘가에서연극 <보더라인>, <자본 2>

 연극 <보더라인>은 독일 레지덴츠테아터와 한국 크리에이티브 VaQi가 함께 난민, 탈북민 등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 간의 ‘경계 지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자본 2> 역시 조세도피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들과, 그 속에 얽힌 실존 인물에 대한 방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이를 통해 각 인물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라 인식하는 국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작품은 내용상으로도, 형식상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경계 짓기의 자의성을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두 작품은 모두 내용상으로 자신이 자란 배경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또, 서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국경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연극 <보더라인>은 ‘국경을 넘은 사람들’을 다년간의 인터뷰하고, 답사를 통해 모은 자료를 재구성하여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입을 빌려 전한다. 난민 수용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주장과 탈북민의 증언은 한국인 배우들과 동독 출신의 배우를 통해 ‘연기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러 국가로 구성된 유럽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걸음을 한발 앞으로 딛는 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일생에서 마주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큰일이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통일’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파장을 생생하게 겪은 동독 출신의 배우가 느끼기에 국경의 무게는 또 다를 것이다. 이처럼 경계를 실감하는 것은 한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 자라며, 무엇을 배워 왔는지와 관련이 있다. 국경의 인식에는 서로의 이해관계 역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존재를 경계선 안쪽으로 끌고 오거나, 바깥쪽으로 내보내려 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각 국가의 시민들이 서로의 국경을 넘는 것에는 우호적이지만, 난만들의 경우 국경 밖에서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탈북민에 관련된 이야기에 ‘출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던 이들조차 채용의 상황 등 실질적으로 경쟁이 도입되는 분야에서는, 자신의 좀 더 유리한 입지를 위해 탈북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한 탈북민이 ‘자신을 탈북민으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하고, 배우의 지인이라는 다른 탈북민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한, 겉보기에 상반되어 보이는 입장은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연극 <자본 2>의 경우 몰타의 조세도피처를 통해 조세법의 허점을 뚫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 슈퍼리치들의 자산과, 난민수용법의 허점으로 인해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시리아 난민을 대비시킨다. 조세 회피를 위해 로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이들에게 국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보트에 탄 채로 바다를 표류하는 난민들에게 국경은 너무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작품은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장면과 대사를 영리하게 배치한다. 조세 도피 시스템을 제공하는 로펌, '모저 폰타나 다이내스티' 대표는 큰 돈을 지불하기로 예정된 고객에게 '(돈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라'며 직원들을 향해 명령한다. 바로 다음 장면에는 내전 상황을 피해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시리아 난민들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라며 처절하게 외친다. 서로 다른 위치의 인물들이 이야기하는 동일한 단어들은, 오히려 사회적 계급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열려있고 누군가에게는 굳게 닫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국경의 모순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 계급의 극과 극이라 느껴지는 지점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로펌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목숨의 위혐을 받는 로펌 직원에게는, 난민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보트를 타고 남몰래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암시가 주어진다. 누군가가 자신의 유리한 입지를 지키기 위해 시도할 때, 손쉽게 국경을 넘던 사회 상층 계급의 인물이 순식간에 마음 졸이며 국경을 넘어가야 하는 난민과 같은 상황에 처하기도 하는 것이다. 화폐로 가득 찬, ‘경제 논리’를 의미하는 무대 위에는, 자본가와 난민들이 각각의 구역을 경계 짓지 않고 교차하며 등장한다. 경계를 절대적이고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극 내내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두 작품은, ‘남의 야야기’와 ‘나의 이야기’의 경계를 흐리려고 시도한다. <보더라인>은 국경의 문제를 단지 물리적인 국경과 연관된 특정 인물들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기 위해 '집'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배우를 제외하고 각각의 배우들은 각자의 ‘집’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공연에 참여한다. 이는 그들이 말하는 경계를 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배우들은 ‘집’이라는 공간이 가장 안전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한 순간도 경계에 대한 안일하고 확고한 인식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작품은 이러한 생각들을 이미지로도 보여준다. 작품의 시작 부분, 영상 속 한 배우는 한국의 남과 북을 나누는 철조망 위에서부터 흰 분필로 선을 긋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쭉 이어지는 선을 계속 그으며 길을 나아가는 모습이 이어진다. 작품의 후반부, 그 배우는 선을 그으며 무대 위로 등장해 무대 위에도 한 바퀴 선을 긋고 나간다. 커튼콜 영상에서는, 그가 여전히 분필로 선을 그으며 극장 밖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 드러난다. 경계의 문제는 우리와 먼 특정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에도 들어와 있고, 계속해서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보여진다. 동시에 영상화 실재를 넘나드는 선은, 우리가 뉴스와 같은 영상 매체에서 보는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구경거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무대 위에는 텐트가 계속해서 존재한다. 텐트는 거처이면서도 임시 거처이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경계선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분류의 민낯일 수 있다. 견고한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듯, ‘나는 경계선의 한 쪽에 분명하게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안정감과 안락함 자체가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이 극 중 내내 표현되는 것이다. 

 <자본 2>의 부제는 <어디에나 어디에도>이다. 작품 속, 상위 1% 슈퍼리치의 조세도피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난민의 삶은 자본주의 경제 논리 속에 서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들은 우리의 일상 속, 값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그 '어디에나' 존재한다. 서로 이어져있는 세계 각국의 화폐가 무대 위 모든 곳을 뒤덮고 있다. 화폐들은 의자와 테이블 등, 인물들이 다양하게 일상을 영위하면서 당연하게 사용하는 삶의 공간을 채운다. 세계 곳곳의 상황을 이어주고 있었던 경제 논리가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직설적일 정도의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테이블과 의자 위 화폐들을 화폐로 대하지 않는 인물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세계 속 큼직한 문제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어디에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연극은, 관객들로 하여금 뉴스 속에서만 존재한다 느꼈던 사건들이 자신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 관련이 있는지를 감각하게 한다. 작품에는 주연, 조연을 크게 구분할 수 없는 17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 '주인공'이라 명확히 말할 수 있을 만큼 등장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인물은 없다는 것이다. 작품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몇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익숙한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우리가 보는 실제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닮아있다고 느껴진다. 세계 각국의 인물들은 무대 위 화폐들이 '이어진' 것 처럼, 관계적으로 몇 다리를 건너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커다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제시하며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곳으로부터 상관없는, 또는 ‘신경 쓸 필요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객석의 관객에게 이러한 ‘연결’이 어느 때보다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은 '박소은'이라는 한국 기자의 이름이 들려올 때이다. 무대 위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주로 우리와 문화적 배경도, 언어도 다른 외국인들이다. 낯선 외국어 이름의 발음, 그리고 익숙한 외형의 사람들과 낯선 이름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관객은 일정 거리를 두고 무대 위 이야기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관객에게도 배우에게도 익숙한 '박소은'과 '뉴스타파'라는 명칭이 들려올 때, 대사나 소품의 활용을 통해 경제논리 속 다양한 사람들의 연관성이 점점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과정과 맞물려, 관객들은 무대 위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또한, ‘삼성그룹의 조세도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는 요지의, 실제 영상을 바탕으로 창작된 뉴스타파 영상은 공연의 시작 전과, 커튼콜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대 뒤에 재생된다. 이는 연극에서 보여진 문제들이 연극 속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극장 밖에서도 그 인식과 고민을 이어나가도록 하려는 장치이다.

 연극 <보더라인>은 독일 레지덴츠테아터와 한국 크리에이티브 VaQi가 함께 난민, 탈북민 등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 간의 ‘경계 지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영상과 실제 인물의 연설문, 극화되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 등을 활용하여 수집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자본 2> 역시 연출의 ‘연극이 아닌 연극’, ‘다큐-드라마’라는 정의 아래에서 창작되었다. 극화되지 않은 듯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며 ‘극으로 만든’ 이 두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그 어색함을 경험하게 하며 지금까지 알아온 ‘연극’과 '연극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게 그렇게 견고한 것이었는지의 혼란을 경험하게 한다. 그 혼란을 통해 앞서 언급된 경계의 자의성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보더라인>은, 어떠한 추가적인 구조물도 없이 모든 구조가 드러나는 빈 무대를 관객에게 그대로 노출한다. 그리고 공연 시작 시간이 되면 배우와 스텝 몇 명은 무대 위에 흰 천을 걸고, 텐트를 세우고, 극 중 사용될 영상을 위해 카메라를 설치한다. 분명 공연이 시작되었고, 공연자가 ‘무대 위’에 있는 것도 맞는데, 무대 위의 행동이 연극을 위한 ‘연기’ 인지, 아닌지 구분해내기 힘들다. 또한 무대 위에는 한 명의 배우만 실제로 존재할 뿐, 그 외의 배우들은 공연 내내 그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ZOOM’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한 공연을 만들어나간다. 앞서 언급했듯, 공연은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아니라, 수년간의 인터뷰와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듯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성격을 표방한다. 그러나 조사한 자료들의 선정과 배치 과정이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어느 정도 드라마가 발생한다. ‘인터뷰’를 텍스트로 옮김에 따라 모든 텍스트는 인위적인 ‘대사’가 아니지만, 동시에 현재진행중인 실제 상황에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라 배우들이 타인의 말을 또는 과거 자신이 뱉었던 말을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하는 것이기에 ‘대사’이다. 무대 위에 실재하지 않는 인물들이 영상 매체를 통해 극을 이끌어가는 부분이 많지만 동시에 작품은 극장에서 실재하는 연극이다. 국경이 다른 배우들은 다른 언어로도 서로 소통하고 있지만, 대본 밖에 있는 일상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의 한계마저도 실제 상황 같지만, 대본에 있는 상황이다. 

 <자본 2>역시 대부분의 배우들의 자료에 기반을 둔 긴 대사와, 극 중 자주 사용되는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자료의 제공을 특징적으로 한다. 하지만 분명 작품은 극화된 연극이다. 두 작품이 객관성과 극화, 연극이 아닌 것과 연극인 것을 넘나드는 데에서 발견되는 낯섦 또는 어색함은 작품들이 계속 제시해 온, 살아오고 배워온 환경에 따라 경계의 인식이 달라진다는 지점과 연결된다. 작품의 형식이 어색하다 느낀 관객들은, 자신이 연극은 ‘드라마가 명확하고 인위적인’ 것이라고 오랫동안 배우고 인식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다큐-드라마라는 명칭처럼, <자본 2>는 <보더라인>과는 다르게 분명하게 인위적인 드라마의 형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작품은 의문의 인물이 두려움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저 폰타나’의 자료들을 차근차근 전송하는 과정, 경제 사회학 교수인 로사가 ‘모저 폰타나’의 임원들을 인터뷰하며 조직의 은밀한 부분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통해 ‘추리물’과 비슷한 형태의 드라마를 구성한다. 이는 방대하고 어려운 자료의 제시를 긴장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하지만 흥미를 위한 빠르고 느슨한 드라마의 구조는, 작품의 많은 부분에 제시되는, 논리적으로 촘촘하고, 인과적으로 제시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는 객관적 자료들과 충돌한다. ‘다큐’에 해당되는 객관적 자료들과 ‘드라마’의 결합을 통해 경계를 유려하게 흐리는 것을 의도했겠지만, 두 요소의 충돌로 인해 서로의 경계가 더 견고해지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두 연극에서 캐릭터의 사용 방식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보더라인>의 경우 배우 당사자가 아닌 인물의 말을 전할 때 그 인물이 배우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연설문을 읽을 때, 그것이 특정 실존 인물의 것이라는 걸 분명히 밝히고, 다른 이의 말을 전할 때도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를 밝힌다. 또한,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수행함을 통해, 역할이 배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반면에 <자본 2>의 경우 인물과 배우가 동일시된다. 연극 <보더라인>은 증언으로 이루어진 극이다. 그런데 모든 증언들은, 배우가 ‘연기’함에도 불구하고 연기하는 캐릭터의 대사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듯 영상으로 제시된다. 물론 영상의 활용을 통해, 한 공간 안에서의 실재와 영상의 공존, 그리고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각각의 장소에서도 한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경계 흐리기’를 분명히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 2>가 드라마의 도입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성과 극화 사이에 충돌을 발생시켰다면, <보더라인>은 객관성의 확보를 위한 시도가 관객과 무대 위 이야기 사이의 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무대 위 이야기가 관객의 삶에도 이어진다는 많은 이미지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모든 증언들은 화면과 스크린이라는 명확한 경계를 두고 객석에서 멀리 떨어져버린다. ‘나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 사이의 경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극 <자본 2>는 캐릭터의 대사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인물의 특성과 대사를 내뱉는 어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극화에 치우치고 있는 듯하다. 극 중 오히려 인물들은 모두 ‘전형적인 캐릭터성’에 기대고 있다. 인물 중 대부분은 교수, 기자, 변호사라는, ‘뛰어난 언변’을 중시하는 직업을 갖는다. 이는 인물들이 ‘평소에 길고 자료를 동반한, 논리적인 발언을 많이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인물이 긴 자료를 이야기하는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전형성이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발랄한’, ‘인자하고 지적인’, ‘교활한’등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전형성은 자료에 대한 흥미를 돋우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오히려 객관적인 자료와 캐릭터 사이의 이질감을 느끼기 하며 다큐와 드라마 사이의 경계를 강화한다. 

 두 작품 모두는, 객관성과 극화의 경계를 흐리며 내용상 말하는 경계의 자의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감하도록 시도한다. 이는 전반적으로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더라인>은 객관성 확보에 치우치고, <자본 2>는 극화된 구조와 캐릭터의 확보에 치우쳐서, 오히려 경계를 강화하는 측면이 작품의 곳곳에 보인다.     

우리 사회 안에서 재구성된 경계 흐리기연극 <정글>

 연극 <정글>은 프랑스 칼레 난민촌에 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난민들은 그들에 대한 대우가 그나마 낫다고 알려진 영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영국으로 가려 하지만, 국경을 넘지 못해 도로를 지나는 트럭에 몰래 올라타려고 위험천만하게 뛰어든다. 하지만 바다에 떠밀려온 난민 아이의 시신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난민촌에 넘어온 영국의 자원봉사자들은 자가용을 타고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은 어떻게라도 난민들의 상황에 다가가고 도움을 주려는 존재들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난민의 상황은 ‘남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숲이라는 뜻의 ‘장갈’을 마음대로 ‘정글’이라 부르고, 난민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국가를 선택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으로 치부한다. 어떤 자원봉사자들에게는, 난민의 문제보다는 어쨌든 그들 개개인의 사적인 상황과 관계가 더 중요하다. 또한, 난민들 사이에서도 권력은 발생한다. 그들 사이에서도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뉜다. 돈을 가지고 있어 브로커를 쓸 수 있는 자에게 국경은, 돈이 없는 자들에게보다는 더 열려있다. 또한, 난민촌 내부의 사람들은 국적에 따라 서로의 구역을 나누고, 인종에 따른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국가의 탄압에 맞서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때는 그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이 가진 국가의 경계는 여러 측면에서 자의적인 것이다.

 공연은 이러한 영역에 대한 경계의 자의성을 연극적 체험으로 제공하기 위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활용한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진행되었던 초연의 경우 긴 런웨이같은 형태의 무대를 사용하여 관객들이 난민촌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된 것처럼 무대를 구성했다.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의도하기도 했다. 관객들은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이야기 속 세계와 관찰자의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관객은 극의 진행에는 관여할 수 없으며, 배우와 같은 방향을 향하는 소극적인 ‘호응’에만 한정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형태이다. 그 점에서 관객은 문득 경계의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며 자신이 속한 곳과 무대 위 세상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형태는 영국에서 작품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부터, 모든 프로덕션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조였다. 우선은 작품이 관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참여해도 좋다’는 기류를 형성해내지 못한다는 점이 ‘착시에 불과한’ 경계의 사라짐을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공연 중 소리를 내지 않는 관객’, 수동적인 관객의 태도가 보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이머시브 씨어터 형식에 어색함을 느끼는 한국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고유의 경험이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다. 

 공연을 보다 보면, 배우들이 다 같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며 반응을 유도하는, 명시적으로 참여를 요청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거리낌 없이 같이 박수를 친다. 하지만 그 외의 장면에서는 의도적으로 경계를 지우려는 속에서도 스스로 경계를 형성하며 온전한 관찰자의 태도를 보인다. 극 중 난민구호활동을 하는 영국인, 폴라가 난민촌 사람들에게, 영국에서 국경을 넘은 아이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요지의 강렬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연설이 끝나고 인물의 주장에 감화된 한 관객이 박수를 친다. 그러자 모든 다른 관객의 의아한 시선은 온통 그 관객에게 향한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이 상황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관객에게도, 관객을 쳐다봤던 다른 관객에게도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하며 경계에 대한 고찰을 한 겹 덧씌운다. ‘관객’이라는 하나의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종의 경계를 느끼며,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모순적인 경계와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극중에는 백인과 흑인의 인종 간 갈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극 중 흑인 혐오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인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위기의 상황 속 서로를 위하게 되는 난민 소년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는 다인종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에서 상연되었을 때, 인종에 따른 캐스팅으로 인해 바로 눈앞에 명시적으로 보여 지던 문제이다. 하지만 인종이 다양하지 못한 한국 사회 내에서는 같은 피부색의 배우들이 서로를 인종에 따라 경계하고 혐오하는 연기를 펼친다. 이는 언어와 이미지의 불일치로 연극의 세계화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더 견고히 깨닫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의미적으로,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 짓는 모습을 보며 경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초연 당시 매진으로 인해 많은 관객을 받지 못했던 탓인지, 서울 연극제 때는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2층까지 이어지는 객석에서, 무대 위에 마련된 소수의 객석에 앉은 관객들을 제외하고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 퍼포머와 관객의 구분은 너무 견고했다. 또한, 대극장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배우들의 보다 크게 외치는 듯한 발성은 보다 이야기가 무대에서 객석으로, 일방향적으로 전달되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난민 문제는 한국에서, 유럽의 국가들보다 늦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난민에 대한 사전지식이 깊게 제시되지 못한 느낌이다. 이 상황에서 난민촌 내부의 세밀한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은, 분명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공연 관람 이후 난민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내게 할 수도 있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에 작품 속 이야기가 관객들과 완전히 경계를 허물고 만나기에는, 낯섦이 불러일으키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경계를 흐리는 시도와 경계선 위의 완성도

 이처럼 최근 공연계에서는 현 사회 속, 국경을 포함한 각종 경계의 '자의성'에 주목하는 연극들이 주목받고 있다. 누가 어떻게 경계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순적인 부분들이 드러난다. <보더라인>, <자본 2>, <정글>이라는 세 작품은, 극화와 객관성, 행위자와 관찰자의 경계를 흐리며 곳곳에 드러나는 국경, 경계의 자의성을 '체감'하게 한다. 따라서 관객들은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들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세 작품은 경계를 흐리려는 지점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기에 초연에 이어 한 차례 더 관객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요소들이 화합을 통해 경계를 흐리기보다, 오히려 충돌하며 경계를 선명히 하는 부분들이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도 역시 '경계선' 위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시도의 의의로 호평을 받는 것을 넘어, 작품성으로도 그만큼 호평을 받을 수 있는 공연으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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