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반쯤만 채웠다.
옷장은 3분의 1을 비워 두었고, 신발장도 절반을 비워 두었다.
거실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하나씩 치우고 나니
집 안에 작은 바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았다.
공간이 비어야 공기가 흐르듯,
삶도 비워야 숨이 쉬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늘 채우며 살아왔다.
냉장고는 가득 차야 든든한 것 같았고,
옷장은 넘쳐야 삶이 풍요로운 것 같았다.
일정표도 빈칸이 없을수록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삶이 너무 빠르게 흐를 때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주머니에 넣으려 한다.
하루를 빽빽이 채우고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면서
그래야만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붓이 닿지 않은 작은 여백에서
비로소 숨을 쉰다는 것을.
하늘이 깊어 보이는 이유도
구름 사이에 남겨 둔
푸른 침묵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인생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가끔은 멈춰 서서
지친 마음을 의자에 앉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를
창가에 놓아두는 것.
시간이 서두르지 않도록
창문을 조금 열어 두는 것.
흐린 날도 괜찮다.
시드는 날도 괜찮다.
꽃도 늘 피어 있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조금 더 천천히
자신의 계절을 걸어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계절 사이사이에
조용히 놓여 있는 것.
바로
삶의 여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