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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Nov 13. 2023

[무소비일기-에필로그] 느리지만 지속하려는 마음

지난겨울부터 시작한 글을 무더위를 보내고 다시 추위를 맞이한 뒤에야 마무리했다. 2월 한 달간 대도시에 살면서 소비하지 않는 삶을 시도했고, 그 후 3개월은 한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새로운 터전을 찾고 이주하는 데 3개월을 더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새로운 공간에서 일상을 보낸 지 이제 한 달 반이 넘어간다. 


나의 무소비 프로젝트는 그동안 자기 착취를 일삼으며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외면해 온 삶의 방식을 근본부터 흔들어보겠다는 결심에서 시작된 작은 씨앗 같은 일이었다. 생산수단에서 괴리된 도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아껴 쓰는 것들뿐이었다.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음에, 좀 더 파괴적인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 무력해지기 일쑤였다. ⟪0원으로 사는 삶⟫에 등장하는 멋진 에피소드들을 볼수록 운신의 폭이 좁은 내 상황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삶의 터전을 옮기면 달라질 수 있을까. 대도시에서 벗어난 공간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비 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 가치 지향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의 무소비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로운 선택지들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시도하면서. 내 이야기는 어떤 삶을 피워낼지 궁금하고 가끔은 초조해지지만, 너무 멀리 내다보지 않으려 한다.   

 

무소비 생활을 시작하면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던 중 ‘무소비,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이라는 기사들을 접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의 한계’라는 맥락에서 시작된 챌린지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내용들이 더 많이 검색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챌린지를 시작한 계기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생활비를 아껴서 부동산, 주식 등의 투자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각종 투자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가 이를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티끌을 모으기보다, 티끌을 뻥튀기 기계 같은 곳에 넣고 몸집을 키우는 데 가깝겠지만 말이다. 


지출을 줄이는 법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냉장고 파먹기’였다. 챌린지 식단으로 올린 음식들은 적은 돈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과 라면, 통조림 같은 인스턴트식품이 주를 이루었다. 장을 봐서 요리하거나 도시락을 챙겨 먹는 예들도 있지만, 이마저도 영양을 챙기기보다는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칼로리를 섭취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게 많았다. 이들 사례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는 것, 바로 경쟁 중심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숱하게 채택해 온 방식이었다.


챌린지까지는 아니지만 무소비에 가까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반복적으로 다짐하게 되는 것이 바로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0원 지출’에 집착하다 보니 지인과의 만남이나 문화생활에 비용을 치르는 게 점점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작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가 돈의 압박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챙기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는데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강렬한 구호를 내걸수록 정작 실천 과정에서 본질이 흐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나의 무소비 생활 또한 완벽한 무소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소비만을 삶에 들인 채 살아가는 데 있다. 소비하지 않은 날들을 콤보로 쌓아가는 데서 만족할 게 아니라,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챙겨가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앞으로의 탈소비 노력들이 깊어질 수 있도록 꾸준히 글로 기록하고 싶다. 별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별스럽지 않아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대신 별스럽지 않은 것을 별스럽지 않게 흘려보내지 않고 그 면면을 살피며 고민하고 느낀 점들을 충분히 소화해내고 싶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삶의 가치들을 구체적인 장면들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해 낼 수 있는 방법들을 보다 자유롭게 찾아보고 살아내고 싶다. 당장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의연하게.


조급해질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 있다. Lento, pero avanzo.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것! 당분간 이 주문을 읊는 순간이 꽤 잦을 것 같다. 그럼 오늘도 Lento, pero avanzo!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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