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며칠 전이었다. 평일 오후 늦게 아이 둘을 데리고 키즈카페를 찾았다. 내게 '키카'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오묘한 공간이다. 아이 둘 육아에 지칠 무렵, 애둘 데려다 놓기만 하면 둘이 데굴데굴 잘도 굴러다니며 노는 공간. 하지만 둘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잠깐 방심했다간, 첫째가 어떤 돌발행동을 보이고 있을지 몰라서 늘 가슴 졸이는 공간. 아이 둘 손을 꼭 잡고 여러 곳의 키카 문을 두드릴 때면 오늘은 이곳에서 어떤 색깔을 마주하게 될지 생각한다. 내 또래 엄마들이 보내는 질타 어린 시선에 마음속 구석구석 새까맣게 잿빛 그림자가 드리울지, 내 아이의 미숙한 소통마저 너그러이 받아주는 그 누군가로부터 해 질 녘 예쁜 노을빛을 담뿍 맛볼지 조심스레 오늘을 예측해보는 것. 오로라 같은 퍼플선셋은 안 되더라도, 어두컴컴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서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되뇌는 마음이다.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운다면 다들 비슷한 마음일 거다. 사람들 많은 곳을 찾겠다고 마음먹는 데는 보통의 육아맘, 육아대디들보다 조금 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 내 아이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자극 지점은 없을지 시시각각 살피는 예리한 시선은 필수. 또래친구들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 방법을 잘 몰라서 괜히 '훼방꾼'으로만 오해받고 있는 건 아닐지, 졸졸 따라다니며 고성능 레이더를 켜는 것도 중요한 미션이다.
아우, 어떡해요
많이 힘들지 않으세요
아이 하나를 낳아 키우는 것도 힘든데, 남매를 키우면서 신경다양성 세계까지 커버하는 게 만만치 않겠다고, 그래서 "참 힘들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맞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은 편편하지 않다. 한 아이는 신경다양성 세계 속에, 또 다른 아이는 그 세계 곁에 머문다.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게 아니면서도 두 아이와 함께 서로의 세계를 매일같이 갈팡질팡 들락날락 마주쳐야 한다. 자폐 스펙트럼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함께 키우는 여정은 그렇다. 한 아이는 벨트 위의 회전초밥처럼 시시각각 돌고 있지만 한 아이는 옛 한옥의 아랫목에 앉아 한식 정찬 풀코스를 차례차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둘은 너무 달라도 달라서 흑과 백보다 더한 영역의 대비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요리사도 아니건만, 두 세계를 바지런히 오가며 이 식당에 발을 들였다가, 저 식당에 발을 들였다가 몸과 맘이 닳도록 바쁘다. 어찌 보면 그 대단한 요즘의 흑백 요리사보다 더한 육아 요리사 아닐까 혼자 어깨 들썩해보는 날이 있다.
어떤 면에서 첫째의 육아는 어렵지 않다. 아이는 가지런히 정리하기가 내 스킬보다 뛰어나며 동생이 구석구석 어질러 둔 광경들을 감쪽같이 카테고리 별로 배열할 줄 아는 비상한 정리력을 가졌다. 이미지와 숫자를 기억해 내는 능력 또한 상상을 초월해서 어디갈 거라고 미리 알려만 주면 그곳이 몇 층인지, 그 공간에서 어떤 노래가 흘렀었는지 바로 재현해 낸다. 요즘 깜빡하기 딱 좋은 엄마에게 최고의 생활 지원꾼이 아닌가!
맥락에 상관없는 말을 할 때도 많지만 엄마와 동생의 대화를 찰떡같이 저장해 뒀다가 필요할 때면 녹음기처럼 그대로 재생해 줄 수 있는 문장 기억력도 예사롭지 않다. 차키는 다른 곳이 아니라 꼭 엄마의 왼쪽 주머니에 꽂혀 있어야만 한다는 고집도 각별해서 내가 가끔 차키를 잊고 외출할 땐 챙기라고 톡톡 두드려주는 센스도 갖췄다. 세심히 살펴보면 첫째는 참 '대단한' 아이다. 그 강점이 그림자 속에 숨지 않도록 자꾸 꺼내주는 게 내 몫이려니 한다.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준 첫째가 진심 다해 고맙다. 아마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회전초밥의 세계를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누군가 회전초밥도 있다고 언급해 줘도 그 세계를 슬쩍 들여다만 보고 말았을 것이다. 가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나랑 관련 없는 식당이라고 굳이 내 동선에 넣지 않았을지도. 아마 익숙한 한식당에 앉아 정찬 코스요리의 메뉴만 살짝살짝 바꿔 맛보며 이 세상은 반찬이 가지가지 나열된 아랫목만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반찬그릇의 안정적인 배열에 편안함을 느끼며 다른 식당도 가보고 싶다고, 그곳은 어떤 맛을 보여주는지 궁금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평일 오후의 키카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신경다양성 세계를 공유하는 남매가 놀기 제격이었다. '왜 그렇게 노느냐'며 눈치 주는 사람도, '소란스럽고 산만하다'며 불편해하는 시선도 부재했다. '아휴, 오늘 키카 분위기, 핑크선셋쯤 되네'. 유통기한 놓쳐 냉장고 저 속에 처박아뒀던 쫄면처럼 굳어있던 지난 마음을 잠시 풀어두는 사이, 남매는 둘이 탱탱볼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잘도 어울려 논다. 미끄럼틀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엎치락뒤치락 깨를 볶아가며 노는 데는 발달지연과 정상발달의 구분이 무색하다. 까륵까륵 대는 소리에는 발달의 느림과 빠름 여부가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 듯하니까. 그 순간, 그곳에는, 전형발달과 비전형발달을 논하는 딱딱한 학문적 용어도 통할 리 없어 보였다. 두 아이 모두 신이났고 많이 웃었다. 나도 배꼽을 잡고 웃었던 오후풍경.
오빠가 가지런히 또박또박 줄을 세우고 놀면 동생은 눈치를 슬쩍 보다가 그 대열을 '폭삭' 망가뜨린다. 고정된 루틴과 확고한 패턴이 있는 신경다양성 세계에 끊임없이 노크하는 동생의 몸짓이 날로 예뻐 보이는 순간이 많아졌다. 나 역시 그런 두드림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사뭇 다르더라도 '똑똑똑' 그 세계를 바라보려는, 다가가려는 마음은 결국 꽉 닫힌 문도 여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뉴로 다이버시티 (Neurodiversity). 이 이야기는 신경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그 '두드림'을 지금 당장 어떻게든 실천하자고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읽기 시작한 그 누군가의 가슴에 '신경다양성', 이 단어가 슬며시 아주 작은 점 하나만 찍어도 좋겠다. '아, 이런 용어가 있구나' 기억만 해주셔도 감사드린다. '발달장애의 한 측면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 '아,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있구나', '어쩌면 무수히 오가는 공간 틈에서 내 곁에 이런 세계의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부드럽고 따뜻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몰랐을 세계, 그 세계를 알아가자고 조금씩 시작된 밑그림 도안에 나는 조금씩 색채를 더해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엄청 어려운 세계도, 불편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도화지를 들고 이야기해 나갈 생각이다. 흑백에 가까웠던 명과 암 확실한 영역이 조금씩 모호해지도록 색칠해 나가기, 그런 붓질을 해야겠다고 조용히 캔버스를 바라본다. 오늘도 '신경다양성'의 세계를 오가며 살아낸 사람들 모두에게 박수. 곧 그러한 세계에 미소를 더해갈 당신을 위해서도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