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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ontext Reboot

중력을 거스른다더니

For good: 위키드 2 관람 후기

by Ellie


*주의: 본 글은 영화 위키드 2편의 스포일러를 대량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즈의 마법사>도 <위키드> 원작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대략적인 설정만 알고 있었다.


도로시라는 소녀가 폭풍에 휩쓸려 오즈에 떨어진다는 것. 그곳에서 양철남자와 사자, 허수아비를 만나 서쪽 마녀를 무찌르러 간다는 것. 그리고 위키드는 그 서쪽 마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는 것.


아주 간단한 배경 지식만 가진 채로 봤던 위키드 1편. 영화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정말 좋았다. 엘파바가 'Defying Gravity'의 하이라이트를 열창하며 오즈를 떠나는 장면에선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였으니까.


남들이 정한 한계를 더 이상 고분고분 수용하지 않을 거라고,

무언가에 도전해 보기 전에는 결말을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태어난 이래, 제대로 받아 본 적도 없는 남들의 사랑을 구걸하는 일은 넌덜머리가 난다고,

이제 그 모든 제약을 벗어나 중력을 거슬러 훨훨 날아오를 거라 외치며 훌쩍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라니.


초록색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죄로 늘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당당히 외치고 있었다.


'님들이 뭐라던 이젠 내 알바 아님. 다 좆 까쇼.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크-.

터치는 도파민. 전율처럼 퍼지는 카타르시스!

쾌녀의 정석을 보여준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서쪽으로 날아간 엔딩 장면은 다음 편에 대한 무궁한 기대를 남겼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마침내 대오각성한 엘파바의 활약기가 멋지게 펼쳐지겠지?

오즈의 마법사도 못 읽던 마법 책을 술술 읽어낼 정도의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장작 1년 여간의 인터미션이 끝나고 마침내 다가온 위키드 후편, For good.


영화 초반부터 묘하게 엘파바의 행적이 짜치는 구석이 있다 싶더니.... 이게... 내용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엄청난 마법 능력을 가졌다는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게릴라 전은 소소하기 그지없었다. 오즈 성까지 이어지는 노란 벽돌 길을 쌓는 공사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훼방 놓기라던지, 빗자루 타고 날아와서 구름 위에 '마법사는 거짓말쟁이다'라는 글씨 쓰기 등등.


그렇다고 오즈에서 배척당하기 시작한 동물들을 위해 멋진 활약을 보이냐? 그것도 아니다. 오즈를 떠나려는 무리 앞에서 '집보다 좋은 곳은 없다'며 일장 연설을 벌이는 게 전부다.


당최 무엇 때문에 오즈의 시민들이 서쪽의 마녀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아기자기한 해프닝들. 공포심이야 마담 모리블의 선동으로 심어졌다고 치더라도, 그런 악명에 어울릴 만 스케일의 사건사고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 뭐, 엘파바의 소소한 반항은 그렇다 치자.

베프 글린다의 결혼식에 난입해 갑자기 신랑을 데리고 런하는 장면에서는 유튜브에서나 볼 법한 막장 사연이 떠오를 정도였다.


//오늘 결혼식인 내게 한 예비 신락의 한 마디

"난 네 절친과 사랑의 도피를 할 거야."

온 국민 앞에서 공식적으로 약혼식 올려놓고

결혼식 장에서 주례받던 순간 경악할 반전//


대충 이런 제목이 썸네일에 박혀 있을 것만 같은 싼티 나는 스토리 라인.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친구도 믿었기에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해 줬고, 그런 만남이 있은 후부터 우리는 자주 함께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어울렸던 것뿐인데...


피예로가 자신의 왕자라는 직위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엘파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설정도 와닿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극단적이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영화 후반부에 도로시 일행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내용은 점점 더 산으로 간다. <오즈의 마법사>를 읽지 않아서 설정은 잘 모르겠다만, 도대체 왜 마녀를 잡으러 가는데 낯선 곳에서 날아온 미지의 이방인과 오합지졸 파티를 원정을 보내는지, 군대는 왜 안 딸려 보냈는지, 그동안 내내 수색해도 찾지 못하던 서쪽 마녀의 위치를 도로시 일행은 어떻게 알고 한 번에 찾아가는 것인지 등등.

원작에서 도로시가 이계에서 온, 마녀를 무찌를 수 있는 선택받은 용사, 뭐 그런 역할이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모른 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불친절한 전개가 아니었나 싶다.


결론적으로 엘파바가 그리머리를 글린다에게 넘겨주며 자신은 이제 영원히 '악'으로 남아 사라지겠다고 하는 장면도 아이러니했다. 1편에서 '그 누구라도 이 넓은 세상에서 한 번쯤은 떠오를 자격이 있다' 외치던 기개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다 네 손에 달렸어, 글린다'라며 한 없이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캐릭터로 변모한다.


동생이 죽어서? 사랑하는 피예로 꼬라지가 말이 아니게 되어서?


애당초 세상을 향해 빅 엿을 날리고 내 뜻대로 살겠다고 날아가던 엘파바가 아니었나? 오즈의 시민들을 위해서 선한 힘을 행사하고 싶다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2편에 모든 장치들이 떡밥 회수가 아니라 어거지 설정처럼 느껴지는 게 대다수였다.

오즈의 마법사가 엘파바의 아버지였다는 것부터 그가 진실을 알게 되고 떠나는 장면, 비선실세였던 마담 모리블이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는 스토리까지.


엔딩 역시 별로였다. 동물들이 단체로 오즈를 떠나려 할 때는 오즈 밖은 아무것도 없다며 이곳에 남아서 끝까지 싸우라고 추동할 땐 언제고 막상 자신은 싸움을 포기하고 떠나는 아이러니라니….




1편 엔딩에서 엘파바가 날아오를 때, 나는 2편에서 그녀가 정말로 무언가를 해낼 거라고 기대했다.

오즈의 마법사도 못 읽던 고대 마법서를 단번에 읽어내는 천재 아니었나. 그 능력으로 뭔가 대단한 걸 해내지 않을까. 마법사의 거짓을 폭로하고, 동물들을 억압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마녀로 낙인찍은 사회에 제대로 한 방 먹이는 거. 그런 통쾌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2편의 엘파바는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주저앉는다. 서사적 패배가 아니라 태도의 포기로 끝난다. 그래서 더 공허하다.


내가 원한 건 'Defying'이라는 동사의 지속이었다. 자신을 계속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끊임없이 맞서 싸우는 모습. 치열하게 그리머리를 연구하고, 전략적으로 동물들과 연대하고, 자신을 악마화하는 여론전과 맞붙는, 그런 장면 말이다.

중력을 거스른다는 건 한 번의 점프로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뒷 내용이 이렇게 그렸다면 어땠을까.


엘파바가 오즈의 군대 및 기계 장치와 일당백으로 맞서 싸우다가 지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시스템의 폭력 앞에 무릎 꿇는 장면. 동물들을 지키려 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는 걸 깨닫는 장면. 그렇게 제대로 싸우다가 패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래도 납득이 됐을 거다.

'최선을 다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게 더 설득력 있는 비극 아닌가.


그러나 2편의 엘파바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좌절하고 포기했을 뿐이다. 몇 번의 소소한 게릴라전, 협박 그런 게 전부였다. 본격적으로 맞붙어 본 적도 없다.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무언가를 시도해 본 적도 없다.


결국 중력을 거스르는 건 그 순간뿐이었나.


날아오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화는 답을 주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극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나에게 '위키드'는 1편에서 끝났다고.

엘파바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장면에서 막을 내렸다고.


결국 영화가 남긴 질문은 이런 거였을까?


과감히 뛰어 내린 후에도 계속 날아오를 수 있는가.


주저앉고 싶을 때도,

세상이 억까하며 끌어내릴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칠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포기하지 않고 중력을 거스를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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