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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Oct 05. 2019

조커; 해석 그리고 비난하기

영화 '조커' 분석




1.


 영화 조커는 파업과 가게 파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경기가 어렵고 불만 가득한 고담시를 배경으로 한다. 시대 상으론 대략 컬러 티비가 보급되고 미디어 방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7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더불어 영화 곳곳에 남겨져 있는 오마주를 보면 70~80년경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플롯은 정말 간단하다. 주인공인 '아서'가 고난과 폭행에 노출되며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미 붕괴된 상태였을 수도 있고, 붕괴된 게 아닐 수도 있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아서는 조그마한 에이전시에서 광대 일을 하며 꿈을 좇지만 재미없다는 비난과 따돌림에 시달린다. 일하던 중에 폭행도 당하고 판넬을 빼앗겼단 이유로 손해배상을 해야 할 지경까지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좋지 못한 가정 형편에 정신상담과 약물치료까지 받는다. 무려 7가지나 되는 약을 먹지만 차도가 없는 건지 더 요구하다 거절만 당한다. 게다가 상담사가 아서의 말을 기억하지 않는 바람에 아서는 불만만 쌓여 간다.

 이후 상담사에게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며 분노를 토해내지만 돌아오는 말이라곤 예산이 삭감되어 상담소가 문을 닫는다는 말과 누구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뿐이다. 결국 아서는 폭행을 당하던 중 살인을 저지르고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조커의 내용과 해석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는데, 크게 모든 게 조커의 망상이라는 주장과 세상이 정말 잔인해서 조커가 미쳐간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나는 모든 것은 조커의 망상이라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 있다 본다. 유일한 진실은 조커가 누군가를 살해한 것. 그러므로 조커는 수갑을 찬 채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영화 초반 '왜 정신 병동에 있었는지 기억하느냐'라는 말이 복선으로 등장하는 점, 아서의 유일한 희망들이 자신의 현실도피 시도였음을 인지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망상이 현실을 붕괴하고 다시 현실이 망상을 붕괴하는 파괴적인 구조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혐오적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다는 걸 떠올린다면 '악인에게도 사정은 있다' 정도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조커 또한 주인공에게 시련이나 나쁜 기억을 심어주는 존재에 유색인종과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 영화가 여성 혐오적 또는 인종차별적 논란에 시달리는 건 연출의 실패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의 주제나 의의가 무엇이든 간에 결과가 혐오와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면 그 영화는 결국 나쁜 영화다. 내가 조커를 비난하는 이유는 영화의 목적이 기득권의 눈에 비친 소외계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기득권들이 지닌 고정관념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감독과 심사위원은 기득권이자 지식인 계층이라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그들이 평가하는 범죄자와 소외계층, 그리고 시위는 폭력과 집단 광기에 불과하다.

 다만 범죄 정당화나 합리화 영화라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게 아니라 감독이 혐오적 시선을 강하게 지녔고 영화에도 그대로 녹아 나왔기에 빚어진 오류라 본다.


 감독의 고정관념은 조커의 각성과 함께 폭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소시민에 불과했던 아서가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이것을 계기로 민중에 의한 집단 광기가 발발한다. 처음엔 그동안 쌓아온 불만을 터뜨리던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 것에 그쳤지만 점점 폭력과 광기로 변질된다. 특히 시위대가 조커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장면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범죄자를 영웅화한다는 비판과 파멸 속에서 이루어진 목적이라는 아이러니가 강렬하게 대립한다.

 나는 이 대립도 좋지만, 감독이 시위대를 왜 그런 식으로 표현했는가를 따지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조커를 영웅으로 만들던, 피해자로 만들 건 그건 스토리 상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전개일 뿐이지 감독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독이 가진 기득권적 고정관념에 의하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시민의 분노와 시위는 광기의 표출이고 부정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기생충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는데, 기생충과 조커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기생충은 지하철 냄새라는 대사를 통해 집중을 깨트리고 관객이 현실로 돌아오도록 연출했고, 조커는 그런 요소조차 없어 관객을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이 작은 차이점 하나로 기생충은 캐릭터에 대한 완전한 이입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모방 범죄나 동일시가 어렵도록 만들었지만, 조커는 논란된 바와 같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지에서 조커와 자신의 경험을 동일시하는 흐름이 너무나도 쉽고 강하게 일어났다. 결국 감독이 의도한 바는 조커도 사실은 불쌍해 이게 아닌데, 포장지에 속아 우려대로 흘러간다. 어쩌겠는가. 의도가 그게 아닐지라도 결과가 그렇게 흘러가면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2.


 영화는 얼굴을 분장하는 아서의 모습과 각종 혼란스러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로 시작한다. 분장은 진실을 감추는 행위로, 곧이어 눈물을 흘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서의 행동과 이어진다. 후일 아서는 코미디를 구상하던 중 정신병에 대해 짧은 일기를 쓰는데, 정신병을 감추고 아닌 척해야 한다는 한탄 가득한 내용을 담는다.

 분장을 마친 아서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채 거리에 등장한다. 노란 조끼와 판넬이 돋보이는데, 이 장면을 통해 색깔을 통해 아서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노랑과 버건디, 그리고 청록 세 가지 색이 등장하는데, 재밌게도 이 색들은 색의 삼원색인 마젠타, 옐로, 사이안과 동일하다. 아서가 그토록 바라는 티비 속 세상은 빛의 삼원색(빨강, 초록, 파랑)으로 존재한다. 결국 아서가 티비쇼에 등장하는 건 이룰 수 없는 경계이고, 그 증거로 아서는 그토록 바라던 티비쇼 출연으로 망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인정하고 파멸로 향한다.


 노랑은 경고와 광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노란색 활자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면서 조커라는 희비극을 통해 한 인간의 광기를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아서 그 자체에 광기가 숨어있음을 암시한다.

 이후 아서는 10대 아이들에게 판넬을 빼앗기고 폭행 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란색 판넬이 산산조각 난다. 나는 이 장면까지가 아서가 겪은 사실이고, 판넬이 부서짐으로써 광기와 함께 망상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또한 노랑은 파멸로 치닫게 되는 아서의 미래를 암시하는 요소로 존재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노란색 차가 관계와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갔듯 아서 역시 자신이 지닌 노란색 조끼와 판넬로 파멸이 예정된 희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아캄병원에서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 또한 노란색으로 가득하다.


 빨강은 열정, 욕망이라는 상징을 가진다. 이는 아서에게 있어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하고 실제 관심으로 이어지는 기회를 제공한다. 무대 출연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검붉은 스웨터를 입기도 하고 버건디 색 정장을 걸치기도 한다. 이후 토마스 웨인에게 자신을 알리려 극장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붉은색 유니폼을 훔쳐 입는다. 하지만 옷으로 인한 관심은 조롱과 모욕으로 이어진다.

 아서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게 되는 건 혈흔을 보게 되면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살인을 저지르면서 언론과 시민의 이목을 사로잡게 되고, 파멸의 계기가 되었던 랜든을 죽인 후 티비 출연을 하러 나선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우상이던 머레이를 죽이고 티비 화면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장식하면서 그토록 바라던 관심을 얻는다.


 초록색은 서양에서 악마, 독,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색이며 빌런을 표현할 때 꼭 등장하는 색이기도 하다. 조커에선 이 색이 청록색으로 등장하며, 조명으로 연출한다. 청록은 아서가 자신의 광기를 인정하고 하나가 되려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첫 살인을 저지른 후 화장실로 뛰어가 춤을 추는데, 이때 어두침침한 연녹색 불빛이 화장실을 메꾼다. 이어 경찰의 수사망에 오를 때에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는데, 푸른빛을 토해내는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는 아서의 모습이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웃 주민인 소피와 만나는 복도도 초록빛 조명으로 가득한데, 누런 조명으로 채워진 집안과 대조된다.

 이후 소피와 친밀해진 게 사실 아서의 망상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이 장면을 다시 재현한다. 아서는 집 안에 서서 문을 연다. 집엔 광기를 상징하는 누런 조명으로 가득 차 있고, 복도엔 광기를 인정하는 푸른 조명이 맴돈다. 두 조명을 가르는 것이 오직 나무로 된 문이라는 걸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아서가 문을 연 건 자발적일까, 아님 패널이 부서진 것처럼 타의에 의한 것일까.


 아서는 노랑, 빨강, 청록의 세 색으로 몸을 치장한 후 티비쇼 출연을 위해 달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치장한 것과 비슷한 노랑, 빨강, 파랑의 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전과는 달리 자유자재로 자신을 다룬다.

 이 세 가지 색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서가 자신을 컨트롤하고 감정이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이러한 색이 없는, 일상적인 색이 절대적인 경우에는 스스로를 다루지 못하며 병이 시달리는 모습이 강하다.

 또한 세 가지 색이 공존하는 장면에선 아서가 혼란을 가져오는 인물로 등장한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와중에 아서는 시위대를 이용해 폭력을 유도하고, 티비쇼에선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광기를 터뜨려 낸다.




3.


 아서는 고난과 시련을 겪고 난 뒤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아서는 여러 차례의 시련을 겪으며 반복적으로 계단을 올랐고, 결국 그 계단 끝엔 망상에 시달리는 엄마와 파멸뿐인 자신의 삶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서는 파멸로 치닫기 전 춤을 춘다. 춤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본능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아서는 기괴한 춤사위를 보이며 광기로 자신의 몸을 채운다. 처음 춤을 추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어색함과 적게나마 남아있는 희망과는 달리,

 춤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에서 아서는 계단을 내려온다. 이전의 아서는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 주로 등장했고,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직장에서 잘린 뒤 웃으라는 표어를 웃지 말라는 내용으로 바꾸는 장면과 방송국으로 향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결국 아서는 진실과 망상 모두가 붕괴되며 자신을 광기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것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4.

 영화 장면 중 신경 쓰이는 게 좀 있는데, 토마스 웨인이 아서와 시위대를 마치 정상인으로 재활시켜야 할 어릿 광대 정도로 여기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한 가난한 이들이 아서의 편을 들고, 언론은 그런 아서의 살인을 어떤 정치적 의도를 지닌 행위로 곡해한다. 아서는 이를 비꼬기라도 하듯 코미디는 주관적이라는 말을 내뱉고 자신의 삶이 비극이 아닌 희극이라 칭한다.

 후반에 이르러선 상담 장면으로 돌아간다. 장소는 정신병원으로 바뀐다. 상담이 끝난 후 아서는 피 붙은 발자국을 옮기며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희극적 장면으로 자신의 희비극을 마친다.

 나는 감독이 토마스 웨인과 아서에게 자신의 성질을 부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 속의 모순을 두 캐릭터로 나누면서 결국 카메라의 관점은 철저하게 토마스 웨인으로 비롯되는 기득권의 시선이다.


 이유 없는 범죄를 보면 사람들은 항상 범죄자의 백그라운드를 궁금해한다. 조커는 그 반응을 노리고 나온 영화다. 범죄자의 삶을 궁금해하는 게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이런 류의 내용이 부정적이라 생각한다. 우려와 같이 조커와 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는 자신을 그에 동일시하고 합리화할 것이다. 혐오를 가진 이들이 영화에 영감을 받는 건 부정할 수는 없다.

 조커에 이입하거나 비난하는 시선으로 영화를 읽지 말고 조커를 바라보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가를 보면 어디를 바라봐야 할 지가 보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엔 감독이 있다. 그래서 0.5점.


#J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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