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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김지선《내밀 예찬》

비밀스럽고 때로는 음침한(?) 내향인들의 이야기

by 별난 감자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책 소개를 보고 '아 이건 내 이야기다' 싶었다.

<내밀함이란 나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이해받고, 각자가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서로의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MBTI가 유행하고 있는 요즘, 나는 INFJ인데 INFJ 설명을 보면 또 너무 맞아서 이 책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저자랑 내 이름이 또 같지 뭐야^^ 이건 운명?)

하지만 음...

나 역시 내향적이고 사람과의 관계를 피곤해하는 스타일이지만

공동체의 가치, 그리고 함께함의 즐거움, 원만한 성격의 장점에 극히 공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공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읽으면서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이야기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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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

주로 학교나 회사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강조되는 '함께'의 미덕을 좋아해보려고 나름대로 애써왔지만 어느 순간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다른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생 때 교회 수련회에서 MBTI를 검사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ENFP였다.

현재 INFJ가 된 나는 과거의 내가 부럽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글 속의 '함께'의 미덕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힘들지도 않다.

물론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도 못지 않게 중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에너지가 채워지기도 하고 체력은 떨어질지언정 기분이 나아진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있고 예전에는 이걸 활용할 줄을 몰라 엄한 데에 소비하고는 정작 필요할 땐 방전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요즘엔 스스로를 좀 더 알게 되고 에너지를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게 된 듯





p.8.

갑자기 변심해서 발설하지 않는 이상

나 혼자만 알고 있을 마음, 시간, 이야기 ….

나는 이런 것들을 아끼고 또 아낀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고 말도 많은 편이지만,

드러내는 것보다는 감추고 있는 게 훨씬 많은 사람이다.

물론 평생 감추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순간의 분위기에, 주변의 위로에 취해 모두에게 발설한 이야기들도 있고

딱히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도 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힘들거나 어려운 일을 혼자 꼭꼭 담아두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을 겪으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혼자서 열심히 정리하며 기록하는 편이다.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마음, 감정, 시간이 소중하고 애틋하다.

나는 나의 감정을 아끼고 나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p. 9.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내밀한 기쁨과 복잡한 행복이 지켜질 수 있기를,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혼자 보내는 시간, 혼자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집에 혼자 가만히 있을 때 하기도 하고, 일하다가 잠깐 여유가 생겼을 때 하기도 한다.

같이 밥 먹다가도 생길 수 있고 공부하거나 책을 읽다가, 드라마를 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에 갇힐 때가 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랑 있거나 혹은 혼자 있을 때는 괜찮지만

나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때는 꼭 '지금 무슨 생각했어?'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할 만큼 악랄하거나 부끄러운 생각은 아니지만 (가끔 그럴 때도 있다)

그래도 방금 막 떠올려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나조차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바로 입밖으로 꺼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때는 '그냥' 혹은 '아 방금 이야기하던 거~'하면서 급하게 지어내고는 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그 모든 걸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닐 때가 많아서 민망하기도 하거든.

예를 들면 초록매실을 먹을지 델몬트 매실을 먹을지, 엑설런트에서 파란색을 먹을지 노란색을 먹을지,

나는 여전히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혹은 요즘엔 고양이로 관심사가 바뀌었는지 따위의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그냥 내 생각...






p.21.

누구라도 OO의 일기를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엄마'의 일기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 일기장이 생각나서 옮겨온 글.

남들에게는 오늘 하루 즐거웠다고 하면서도 일기에는 고단한 하루에 대한 원망과 욕이 섞여있다.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하면서도 일기에는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최근 수지가 나오는 드라마 '안나'의 예고편을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일기에도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나는 워낙 생각이 많고 비밀도 많고 앞뒤가 다른 터라(부정적인 의미는 맞지만 가면이 많다는 말로 이해하길)

아무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일기에만 토해낼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참 많다.

일기에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너무 괴로워서,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서,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는 것만 같아서 '써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일기를 썼다.

하지만 고등학생 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우리 엄마는 너무 궁금해 했고 결국 내 일기장을 훔쳐봤다.

그 이후 나는 일기장을 들키지 않도록 사물함에 넣어 자물쇠를 꼭꼭 채워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쓰지 못했다.

거짓말이 아닌 진짜 일기를 다시 쓰게 된 건 2020년 취업 후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누군가 놀러오더라도 이제는 24살의 성인이기 때문에 노트 앞에 대문짝만하게 '일기'라고 써놓아도 그 누구도 열어보지 않는다.

내가 뭐 다크하다거나 비밀스럽다거나 신비롭다거나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이 많고 또 감정이라는 게 일시적인 경우가 많아서 분명히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일기를 쓰며 되돌아보다가 망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완전히 망했다고 힘들다고 생각한 하루였는데 일기를 쓰다보니 꽤 괜찮은 하루였던 적도 있다.

내 일기를 보면 나조차도 내가 알던 나와 다른 나를 볼 때가 많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보면 오죽하겠나.

이러니 나도 나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서 또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p.37.

취미라는 게 그래서 좋은 거랍니다.

포기해도 상처가 없지.


글쓰기, 책 읽기, 요가, 요리, 운동, 청소.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위와 같이 대답한다.

하지만 사실 위에 있는 그 무엇도 '취미'라고 할 만큼 즐기거나 잘하거나 자주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내가 좋아하는 것'

취미라는 건 참 좋다.

꾸준히 하지 못해도 죄책감이 없고 더이상 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한다고 해도 취미니까 괜찮다.

그래서 취미라는 이름 안에 나의 욕심, 내 꿈을 마구마구 넣는다.




p.42.

잠이라는 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다.

무언가를 보느라, 남은 일을 하느라, 내일 아침을 불안해하느라,

이 모든 밤 시간 동안의 나는 주로 분주했다.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불면의 나날들이었던 셈이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날들이 있다.

2019년이 특히나 나에게 그랬다.

이렇게 하루를 끝내긴 아쉬워서 졸린 것을 참아가며 억지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몸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해 정말 자고 싶었지만 책을 읽느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했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읽은 책의 내용은 기억이 안날 뿐더러 늦게 자는 바람에 다음날에는 더 피곤했다.

이렇게 멍청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한 이유는 '주경야독'의 오기랄까?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생계를 위해 학교가 끝나고 밤 12시까지 일을 했고, 꿈을 위해 방송국 일을 했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꿀강의보다는 어려워도 배우고 싶고 궁금한 과목만 골라 들었기 때문에 수업도 과제도 빡셌고 그 와중에 나는 A+을 맞고 싶었다.

대본이나 질문지를 완성했음에도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몇 번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일을 줄일 수 있었음에도 풍족하게 살고 싶어서 주6일을 알바에 올인했다.

그래서 낮에는 학교에 집중하고 중간중간 틈틈히 회사 일을 하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책을 읽거나 레포트를 썼다.

사실 책을 읽은 건 몇 달이 되지 않는데, 레포트를 쓰기 위해 밤을 샌 일을 많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공부'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1교시 수업, 6시간 풀강에 점심시간도 없이 3시간 근로장학생, 퇴근하자마자 카페로 달려와서 5시간 근무.

바로 다음날이 시험이자 레포트 제출일인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원망스러워서 울면서 레포트를 쓰고 울면서 공부한 날들이 참 많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힘들고 기특하고 안쓰럽다.

그래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어. 고마워.

그 긴 밤을 꽉꽉 채워 노력해줘서 고마워, 일주일 동안 10시간도 자지 못한 채 고군분투했던 나의 고생을 내가 알아.

정말 고생했어. 지금의 나에게 하라고 하면 못할 걸.

26살의 나보다 23살의 내가 더 대단해






p.60.

언젠가부터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만남은 나의 일상에서 점점 사라졌다.

모두가 각자의 휴대폰만 힐끔거리는 모임이나,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도 도돌이표처럼 결국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사람과의 약속도 사라졌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담을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운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적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을 쪼개고 에너지를 아껴서 집중해야하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쁘다 보니 요즘 내 에너지의 80%는 일에다가 쏟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줄 에너지가 많지 않은데

에너지가 없으면 남의 얘기 잘 안들어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그건 예의가 아니라 더욱 사람들을 안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나머지 20%는 스스로에게도 좀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p. 111-112.

세상의 모든 파티션은 사라지는 추세였다. 세련된 업무 환경을 자랑하는 공간일 수록 더욱 그랬다.

(중략)

나는 평소에 아주 쉽게 해내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업무 전화를 할 공간을 새로 찾아야 했고, 자리에서 샌드위치를 먹기도 어려워졌으며, 맘 편히 메신저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근무 시간 내내 지속되는 불안정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옷을 입지 않고 거리에 나선 듯한 허전함,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듯한 초조함에 적응하지 못했다.

(중략)

나의 파티션을 돌려달라. 평범하디 평범한 회색, 혹은 흰색, 심지어 연두색이어도 좋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보다는 독서실을 좋아했다.

뻥 뚫린 열람실보다는 칸막이가 있는 자리를 선호한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자의식 과잉 따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자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안정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부할 권리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자리에 칸막이가 없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기이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하는 것도 있고,

전체적인 팀 부서가 재조직되는 과정에서 '공유 오피스'라는 새롭고 참신한 모델에 본부장님과 팀장님이 푹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트북에 서류에 매일같이 출근하는 직원들에게는 매일 다른 자리로 옮겨야하는 공유 오피스는 스트레스와 눈치의 대상이었고 결국엔 말만 공유오피스일뿐 칸막이가 없는 지정석이 되었다.

나는 뻥 뚫린 공간에서 그 어떤 것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내가 하고 있는 일, 짓고 있는 표정, 마시는 음료까지 모든 걸 공유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고, 나 역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불안감과 긴장감은 떨칠 수가 없다.

결국 집에서는 40분이면 끝낼 일을 회사에서는 4시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애꿎은 한글 파일만 켰다 껐다가 인터넷 기사만 대충 둘러본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8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야 8시간(사실 6시간이면 끝날)의 일을 저녁 시간 3시간을 할애해서 하고 있다.

해결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불안하게 8시간을 일하는데 집에 와서 또 3-4시간을 일해야한다는 사실이 큰 스트레스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일하면 도대체 나만의 시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왜 난 회사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딴 짓을 많이 하지도 않고 일이 느린 편도 아닌데 회사에서 집중하지 못하는 게 너무 힘들다.

공적인 공간에도 사적인 영역이 필요하다.

세상이라는 집에, 나라는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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