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by 엘샤랄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있는데, 여러 출판사 중에서도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으로 책을 한 권, 두 권 사서 읽고 있다 소문을 냈다. 표지의 삼분의 이가 하얀 바탕인 점이 좋았고, 다소 폭이 좁아 내 손에 척 하니 감기는 맛이 좋았다. 또한 길쭉하니 책장을 넘기는 속도감도 괜찮았다. 글자체마저도 고전문학에 어울리게 고풍스럽다며 자기만족에 푹 빠져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주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 댔는데, 가만히 듣고 계시던 작가님께서 때마침 자신에게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에서 같은 책 두 권이 있다며 한 권을 나에게 선물해 주시겠다 하셨다. 어찌나 감사한지 그 시절이 2024년 5월이었다. 선생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나는 책장에 예쁘게 꽂아 두었고, 때가 되면 읽어야지 싶었는데 어느덧 2025년 8월인가 보다.


몇 달 안 되었겠거니 했는데 1년이 지나버리고 말았다. 학부 시절, 영어영문학과는 언어 쪽과 문학 쪽 모두를 다루는 학과였다. 4학년 때에 비로소 '영미희곡'이라는 과목을 들을 수 있었고 그때 교수님에게서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소개받았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해서 읽어두긴 했는데, 그 깊이가 참 간사한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 가르치랴, 또 키우랴 일상에 치여 이십여 년을 보내고 다시 이 책을 집어 든 것이다.


생활인으로서 두 아이를 키우고, 사업하는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오늘에서야 다시 읽는 이 책은 나에게 신문보다도 사실적이고, 가감 없는 부모교육서였으며, 인간사를 아우르는 철학책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래서 고전일 수밖에 없음을 한 번 더 각인시켜 주는 시간이었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야망 넘치는 세일즈맨 윌리. 그가 향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환영받고 그 앞으로 레드카펫이 깔린다. 회사에서는 원하는 실적을 쭉쭉 찍어내는 능력자이자, 두 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좋았던 시절은 이제 모두 과거가 되어, 그는 그저 추레하고 늙은 퇴물이 되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기서 일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이르다. 전자제품의 할부금이 남아 있고, 주택 융자 할부금이 남아 있다. 두 아들은 자립하지 못해 여전히 윌리의 주변을 서성인다. 한 때 영광의 자리에 올라 눈이 부셨던 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런 아들은 이 모든 상황이 아버지 탓이라며 으르렁 거릴 뿐이다.


윌리를 보며 '허영의 세상'을 탐색한다. 여자의 허영과 남자의 허영, 그 시작을 본다. 하지만 남자의 허영에는 아내를 위한, 혹은 자식들을 위한 명분이 깔려 있는 듯 보인다. 내 가족들에게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선사하겠다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허영으로 둘러 쌓인 세상을 설계한다. 수학 점수에 신경쓰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은 이 남자에게는 하찮은 일이다. 남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고, 박수받는 자리여야 가치가 있다 한다. 남자는 집 안에 망가진 물건 정도는 뚝딱뚝딱 고칠 줄도 알아야 그게 남자다. 그런 남자의 어깨 위에 허세와 허영이 가득하다. 그의 아내 린다 또한 '내조'의 이름으로 남편의 허영을 묵과한다. 결국 그녀는 낡은 스타킹만 기워 신는 신세다.


누구에게나 숨길 수 없는 허영이 있다. 욕망은 야망이 되어 뻗어 나간다. 잔잔한 호수 같은 일상을 살다가도 사촌이 땅을 사고 집을 사면 속은 쓰리다. 그럴수록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나의 삶은 도돌이표 천지다. 몇 개의 음표를 그려 넣고 무한 반복이다. 이번 마디에서는 제자리걸음을 벗어나 조금 더 역동적인 음표를 그려 넣고 싶지만 그 길은 요원해 보일 뿐이다. 미련하게 또 오늘을 반복한다. 벗어날 생각만 했다. 딱 십년이면 되겠지.


아니었다. 삶은 나에게 그 미련한 오늘을 벗어나려 하기보다 더 살아 보라 했다. 빨리 요 몇 마디를 벗어날 생각만 했는데, 조금 더 정신을 쏟고 마음을 쏟아 연주해 보라 했다. 반추하라 했다. 똑같은 음을 아주 정확히 박자에 맞춰 연주해 보기도, 점점 강하게, 점점 약하게 혹은 스타카토로도 연주해 본다. 그리고 그 소리를 음미한다. 내가 갔던 그 길이 깊이 파인다. 조금 더 파여서 이 길이 내가 갔던 길이요 확연히 눈에 띌 때까지 걸어봐도 되겠다.


한 발짝 물러선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으로 살아 보련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 길로 가보련다. 그 길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나의 모습이 결코 윌리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