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방학, 아주 특별한 수업 의뢰가 들어왔다.
올해 3월, 도서관에서 영어그림책 읽는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동아리 회원들은 영어라는 언어에 비교적 친근한 사람들답게 대부분 솔직하고 매사에 밝았다. 영어라는 언어는 한국어에 비해 발음이 표현적이고 제스처 또한 큰 편인데 언어적 성향이 일상 대화에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 면면들이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으니 더욱 도드라졌다.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페르소나 중 하나가 취미 활동과 자연스레 연결됨으로 그 페르소나에 걸맞는 나의 또 다른 욕구가 발산되며 나는 동아리 활동에 색다른 재미를 느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시기에 한 엄마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눈 밑에 콕콕 찍힌 주근깨마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나보다는 한 살 위이지만, 언제나 밝다. 인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고 또한 솔직하다. 그 솔직함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기에 그녀를 대할 때면 나도 진심 어린 나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 그녀가 5개월간의 활동을 지속하던 중에 조심스레 개인톡으로 연락을 줬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이 하나 있는데, 영어 문법 정리가 필요하단다. 아버지가 미국인이라 영어에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시험을 보면 문법 문제 위주로 틀리니 점수가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나 보다. 나 같은 선생님이면 맡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떤 마음으로 수업을 부탁하였을지 알았기에 그녀에게 연락이 왔을 때 그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수업시간표를 조율해 보니, 가능한 수업 시간대가 금요일, 토요일 저녁뿐이었다. 가장 쉬고 싶고 가장 널브러지고 싶은 바로 그 시간. 하지만 영어강사 이전에 나라는 사람을 먼저 알아봐 주고 그래서 수업을 부탁한 그녀의 진심이 먼저 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에 시간상의 불편함은 감수하고 일단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수업을 시작하는데, 이 자식! 나보다도 발음이 좋다. 아빠가 미국인인데 어련하시겠어. 발음 좋은 걸로 기선제압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이 학생에게 없는 것, 나만이 알려줄 수 있는 것, 기간은 단 3개월! 수업을 해본다. 수업에 임하는 자세를 본다. 비교적 시간은 잘 지키는 편이나, 자신이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목적의식이 없다. 영어를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지식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고 철자 실수도 빈번하다. 글씨체는 힘이 없고 들쑥날쑥이다. 기본부터 잡아줘야 했다. 한 권의 문제집을 공부하면서 '정성'을 담아 끝까지 완주해 보는 경험을 통한 성취감을 선사하고 싶었다.
단 한 문제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학생과 신뢰가 쌓였겠다 싶을 때까지 인내하였다. 너그럽게 지켜봐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업하는 날마다 날씨는 짓궂었다. 저녁이었지만 여전히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았기에 공부방에 도착한 학생의 옷이 흠뻑 젖었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또 흠뻑 젖어서 왔다. 그래도 수업에 늦지 않고 와준 학생을 기특하게 여겨가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났을 무렵, 나는 다시 기본부터 잡아나갔다. 미국인 아버지 성을 붙인 이름 뒤에 '정성'이라 별명을 붙여 주었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태도라 생각한 단 한 가지였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너의 이름은 '정성'이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한 권의 문법책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고, 막바지 중간고사 대비를 통해 영어 자존감을 일치시켜 주고 싶었다.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는 주관적 판단에 실질적인 점수라는 객관적 지표를 더해서 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시험대비는 쉽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예상 문제를 풀어 본 경험이 없었기에 연습 문제는 날림이었다. 그래도 지켜봐 주고 함께 오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제나 선지를 끝까지 읽지 않아 틀리는 문제들에 대해 자각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단계를 생략하고 마지막 단계에서의 최종 기출문제만 풀렸다. 그리고 시험 전전날, 학교기출로 연습을 해본다. 69점이다. 틀린 문제를 본다. 틀릴 게 없다. 고작 중학교 내신시험일뿐이다.
배팅을 했다. 이번 연습 시험에서 90점을 넘기면 바로 보내 줄 테니 '정성'을 다해 풀어보라 하였다. 89점이다. '1점'의 차이를 말해줬다. 절대평가 기준에서 89점은 90점과 결코 같을 수 없는 현실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므로 학생은 다른 학교기출문제를 한 세트 더 풀어야 했다. 92점이 나왔다. 보내줬다. 그리고 시험 전날, 역시나 같았다. 문제를 푸는 태도는 바뀌어 있었다. 학생에게 기대하는 나의 영어 점수를 말했다. 무조건 90점 이상이어야 했다. 드디어 시험 당일,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다급하게 나를 찾는 문자, "쌤쌤쌤쌤쌤." 뜸을 들인다. 한 글자, 한 글자 문자가 왔다. "저, 9,3점이요."
학생에게는 처음 받아보는 점수였다. 점수 향상의 요인은 실력 이전에 '태도'였음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