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늘보의 미래진료소_Day17
2) 협력의 미래
지난 시간에는 갈등의 미래에 사는 제품 디자이너 빌의 하루를 지켜보았다. 빌이 사는 세상은 연결성이 극대화되어 언제 어디서든 빌에게 업무연락을 할 수 있었고, 더욱 세분화된 분업은 빌이 동시에 여러 일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발달한 가상공간 기술은 빌이 하루 종일 집에서 일만 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자신보다 가상공간 속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아바타를 꾸미는데 돈을 더 많이 쓰게 만들었다.
이처럼 극대화되는 연결성은 더 넓은 시장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더욱 경쟁적인 시장을 제공한다. 과거라면 언어와 사는 지역 등의 직업에 필요한 능력 외의 다른 요소들이 다른 경쟁자들을 걸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발달되는 자동번역이 가능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기술은 이러한 허들을 없애 지구촌 경쟁시대를 개막할 것이다. 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보다 더 처절하게 픽미업! 을 외쳐야 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막을 수 없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과 항상 함께 해왔다. 러다이트 운동을 비롯한 기술의 도입을 반대했던 운동들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아직은 인간의 욕망이 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결국 연결성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고, 그로 인해 더 넓은 시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남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결국 살아남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또 다른 미래를 준비했다. 이번에 들여다볼 미래는 '협력의 미래'이다. 저번 시간처럼 시나리오 방식으로 가상의 개인인 '피터'의 하루를 지켜보자.
2040년 3월 어느 날 피터의 일상
아침 7시, 피터는 침실로 은은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잠을 깬다. 피터의 각성이 감지되자 스마트하우스는 아침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어준 뒤 피터가 씻고 나오는 시간에 맞춰 에그 베이글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한다. 8시 반까지 여유를 가지며 아침을 즐긴 피터는 개인비서가 정리해 준 오늘의 할 일과 소식들을 검토한 뒤, 9시에 업무를 시작한다.
피터는 대학교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두 개의 혁신그룹 팀에 소속되어 있다. 피터가 어릴 적에는 한창 범지구적인 문제들로 온 세상이 시끄러웠다. 환경, 인구, 식량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범지구적인 협력이 필요했고, 이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 가능한 가치에 대해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어렸던 피터는 이 영향을 받아 '지속 가능한 가치'를 꿈꿨고, 지금은 환경을 복구하고 유지하며 향상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피터의 오전 업무는 혁신그룹 팀원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수로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검토하는 것이다. 범지구적 문제를 겪으며 정부나 기업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혁신그룹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그룹들은 당시 산적했던 문제들을 저비용 고효율로 해결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들을 내어놓으며, 복잡한 문제 해결을 위한 주요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
이 팀에는 수로 전문가뿐만 아니라 해당 수로의 고장에서 오래 사셨던 어르신, 지구 반대편의 과학꿈나무 등,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리지 않고 50명이 넘는 인원들이 소속되어 있다.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과정은 공모전과 같은 방식이라 다른 팀과 경쟁하는 것 같아 보여도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모두 공감하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
물론 공모전이기에 아이디어의 채택 시 그에 대한 상금 또는 보상이 있다. 그러나 피터나 그의 팀원들은 이 상금을 타낼 생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 바라는 건 문제의 해결, 그리고 경험이다. 범지구적인 에너지 고갈 문제를 겪으며 피터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집에 태양열, 풍력, 수력 등을 이용한 소형 발전기들을 설치했다. 피터는 일과 중에 이 발전기들을 관리하며, 이 발전기들이 만들어내는 잉여 전력을 팔아 돈을 얻는다.
이 방식이 큰 효용을 보자 몇 년 전부터 정부와 시민 간의 기본소득 제도에 따른 계약이 되었다. 그렇게 기본소득 제도가 자리 잡자 사람들은 돈을 더 벌기보다는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고, 경제의 중심이 돈으로부터 자아실현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피터를 비롯한 팀원들은 혁신그룹에 문제 해결을 위한 열망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점심을 여유롭게 즐긴 피터는 2시가 되자 외출을 한다. 과거의 공장지대는 여전히 환경개선이 필요하지만 주거 구의 공원들은 훌륭한 모임터가 되어준다. 공원에 나가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운동하거나, 토론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한쪽에선 '메이커'들이 자신의 창작품을 내어놓고 팔고 있다. 피터는 집의 소형 수력발전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메이커'들의 모임에 참여한다. 이들은 스스로 소형 수력발전기를 다양하게 개량하며 실험하고 결과를 공유한다. 이 모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은 80대의 할아버지신데 오랜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대단한 열정을 보여주신다. 지금 속한 수로 혁신그룹도 이 분을 통해 소개받았다.
길어진 모임 끝에 다 같이 저녁과 술을 즐긴 피터는 집에 들어와 여가를 즐기다 잠을 청한다. 내일은 정기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날이다. 기본소득이 있어 정기적인 직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나 돈을 더 원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인 직장을 갖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가며 무리하게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피터의 직장 또한 하루 4시간 주 2일제로 운영된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공원 근처에서 버스킹을 하는 클로에와 만나 같이 데이트를 즐길 생각이다. 양복 공유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추천해주길 기대하며 피터는 잠이 든다.
피터의 하루는 여유롭다. 범지구적인 문제에 대해 협력을 배운 사람들은, 지속적인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협력의 방식을 택했다. 에너지 생산방식을 소수의 대형 발전소에서 다수의 소형 발전기로 바꾸며,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성공했으며, 이 경험은 범지구적으로 공유되어 다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뢰의 발판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다. 잉여전력과 맞바꾸는 기본소득 제도가 실행되면서, 기본적으로 집과 환경관리만 잘하면 자동으로 전력이 생산되고 판매된다. 따라서 그만큼 돈을 위해 일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일과 여가 시간의 균형이 잡혀가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책과 토론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물론 이 '협력의 미래'에서도 극대화된 연결성은 더 넓어진 시장을 가져다주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여전히 많지만,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뛰어들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경쟁이 줄어들자 범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며 협력을 배운 사람들은 극대화된 연결성을 협력하기 위해 사용한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 아이와 어르신들 등을 비롯한 불특정 다수로부터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고, 검토하고, 실행을 위해 사용한다.
'갈등의 미래'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동시에 여러 직장에 고용될 필요가 있었다면 '협력의 미래'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본소득이 있어 필요한 사람만 정규 직장을 얻으면 되고, 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람과 빡빡한 스케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렇게 경쟁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아바타를 위해 비싼 양복을 사주지 않는다. 그보단 자신의 여가시간, 기부금,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단체나 정책을 위해 더 많은 소비를 한다. 즉, 의미 있는 소비가 늘어난다. 또한 협력의 가치가 대두되며 공유의 가치 또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아진다. 차나 옷을 공유하는 시스템은 물론이고 더욱 많은 것을 공유해 나가며 물질적 소비를 줄여나간다.
피터의 세상에서도 기술의 발달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더 넓은 시장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치열한 경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협력을 통해 문제를 극복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 살지 않게 되었다. 이전 시간에 빌의 세상에서도 전 지구적 문제는 똑같이 닥쳐왔다. 그들 또한 그 문제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썼으나 갈등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각자도생 하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정말 기술의 발달이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 기술의 발달이 문제인 걸까? 정말 기술의 발달이 문제라면 빌과 피터는 같은 미래를 맞이해야 하지 않았을까? 기술의 발전들은 늘 양면성을 보여왔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발견, 발명들의 원리는 반대편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빌과 피터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에 의한 영향력보다 그 기술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도대체 빌과 피터 세상의 사람들은 같은 기술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한 걸까? 그리고 왜 다르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다음 시간에는 빌과 피터의 시점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되감아 2025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