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밤은 무섭게 느껴질 만큼 힘찬 바람이 지배했다. 어떠한 고민도 없는 것 처럼 우리가족은 철썩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구멍이 숭숭한 검은 돌들과 푸르게 맑은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를 보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무거운 어떠한 덩어리들을 잊었다. 제주의 바람은 어찌나 힘차던지 끄떡도 하지 않던 덩어리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일상이라는 건 참을 수 없이 힘들게 우리를 짓누른다. 여행에서 특히나 즐거워 했던건 나였다. 초등학교 4학년때의 생일날 처럼 내 볼은 붉게 상기되었다. 엄마도 나도 동생도 이전에 누렸어야 했던 우리가족으로서의 행복을 찾아온 것 같았다. 우리가족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나... 온화한 가족이 될 수 있나... 우리는 모두 성장하기 전에 멈추어버린 영혼들이었다. 가끔 영혼은 다치지 않기 위해 겨울잠을 자기도 하는 법이다. 은이는 자신의 색깔을 지웠다. 그의 프로필은 흰색 배경에 흰색바탕 이름은 쉼표였다. 다른 이들에게서 '무'라는 존재로 살아가길 선택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걸지 않았다. 그냥 혼자가 좋다고 했다. 참 외로워 보였다. 그걸 보는 난 마음이 아팠다. 그런 은이가 가족여행에서는 사진을 유달리 많이 찍었다. 그렇게 말이 없는 애가 카메라를 가지면 좋겠다는 말을 3번이나 했다. 걔가 찍어낸 사진안에는 공허함 속에 맑음이 서려있었다. 사진기로 길게 넓은 풍경들을 응시해냈다. 우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냈다. 사진기를 사주고 싶었다. 인생은 원래 많이 힘들지만 그 힘든만큼 행복할 때도 있고, 재미없을 때도 있고,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다고 그냥 우리 더 행복하게 살자고 뭐 그런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제주는 우리처럼 외로운 섬이었다. 육지에서 떨어져 태어난 그 섬은 혼자 끓어오르는 생명력을 내뿜으며 강한 바다의 힘을 홀로써 견뎌냈다. 바람은 외로운 섬을 덮치며 많은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들어냈지만 그 사람들은 또 그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냈다. 돌지붕을 만들고, 몸을 낮게 웅크려 살았고, 외로운 이들은 또 외로운 이들끼리 살을 부비며 온기를 느끼고, 또 가끔은 바람을 맞으며 외로움과 괴로움을 견뎌냈다. 제주는 그래서 단단해 보인다. 외로워질 운명으로 태어났다지만 그 외로움 속에 있는 강한 생명력으로 묵묵하고 꾸준하게 그곳을 지켜낸 제주는 다른 어떤 곳 보다 강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