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 해외봉사단원 이야기, OJT 편
OJT(On-the-Job-Training)를 하는 동안 마리오와 내가 묵은 곳은 크레스코(Cresco)라는 곳이었다. 숙소 정문을 나와 커다란 나무 뒤에 있는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면 고속도로가 하나 나온다. 그 맞은편에 대문이 하는 있는데 바로 돈 보스코 대학교(Universidad Don bosco)의 입구였다. 크레스코는 이 돈 보스코 대학교의 외국인 기숙사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지낸 이유는 안전 때문이었다. 크레스코는 대한민국명학교와 마찬가지로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요새처럼 높은 담이 기숙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안에는 경비 두 명이 상주하고, 낮에는 커다란 우리 안에 있다가(우리라고 하기엔 우리 집 안방보다 두세 배는 더 컸지만) 밤이 되면 이곳을 지키는 맹견 두 마리도 있었다.
이곳에는 커다란 공용 주방과 세탁실, 시멘트 바닥으로 된 야외 농구장, 늘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넓은 정원, 소파가 있는 통로, 간이 의자를 높게 쌓아 놓은 커다란 다용도실이 있었다. 그리고 정문에서 가장 먼 쪽에 이곳에서 가장 큰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곳이 숙소였다.
방은 원룸형 1인실이었다. 개인 화장실과 샤워실, 싱글침대와 책상, 붙박이 옷장도 하나 있었다. 창문도 커다랗고 창문엔 창살과 노란색 암막 커튼이 달렸다. 벽은 커다란 벽돌의 형상이 그대로 보이는 흰 벽이었다. 벽에는 사제 돈 보스코의 초상사진이 걸려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작고 차가운 방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특히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생전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독립된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매부리코의 올백머리를 한 키가 작은 멕시코 남자, 눈빛이 매서운 콜롬비아 남자와 같은 국적의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백인 남자, 키가 매우 큰 독일 여자 둘, 그리고 대만에서 온 여자 봉사단원 두 명이었다.
멕시코 남자와 콜롬비아 친구 둘은 매일 밤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 밤잠을 설치게 했다. 독일 여학생 둘도 처음엔 이들을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이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놀았다. 대만 봉사단원 중 하나인 린다는 무용을 하는 친구였는데, 가끔 다용도실에서 혼자 훌라춤을 추는 정도였다. 다른 대만 봉사단원 소피는 가끔 주방에서 마주쳤는데, 늘 아주 적은 양의 음시만 요리해서 조용히 먹곤 했다.
기숙사는 대체로 좋았지만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우선 변기는 매우 작았다. 엘살바도르 남자와 여자 평균키는 170cm, 156cm 정도로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작은 편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장실 변기는 어디나 다 작았다. 그중에서도 이 기숙사의 화장실 변기는 유난히 더 작았다. 어린이용 변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작았다.
샤워기는 붙박이로 붙어있어 겨우 머리를 움직여 방향만 조절할 수 있는 형태였다. 차가운 물만 나와서 샤워 전에는 꼭 팔 굽혀 펴기를 해 몸에 열을 내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엘살바도르는 열대성 기후라 견딜 수 없을 만큼 날씨가 더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지역 나름이었다. 수도 산살바도르는 약 해발 700미터 고도에 위치해서 그런지 강한 해에만 노출되지 않으면 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산살바도르와 비슷한 소야팡고도 그리 덥지는 않았다. 반대로 해안가 근처나 지대가 낮은 곳은 늘 찜통 같은 더위가 기승이다. 산미겔(San Miguel), 손소나테(Sonsonate), 라리베르탇(La Libertad), 우술루탄(Usulutan) 같은 곳들이 그렇다. 3, 4월은 어디나 더웠다. 11, 12월은 또 어디나 선선했다. 특히 12월은 바람이 심해 외투를 입고 다니곤 했다. 현지인들은 패딩에 비니까지 썼다. 해발 2,730m로 지대가 가장 높은 엘피탈(El Pital)에는 눈이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크레스코와 대한민국명학교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을 걸어가는 일은 없었다. 길이 외따로 떨어져 으슥하기도 했지만 치안이 안 좋은 걸 고려해 학교에서 픽업용 차를 보내줬다. 픽업용 차량은 택시가 주로 왔고, 가끔 여의치 않을 땐 교감선생님 롤리의 셋째 아들인 알레한드로가 자신의 승용차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짧은 거리를 매번 차를 얻어 타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처음에는 우리에게 출퇴근용 차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최소 연식이 30년은 돼 보이는 외관의 폭스바겐 비틀이었는데, 겉보기에는 이래도 엔진은 멀쩡하다고 했다. 이 작은 차가 웬만한 언덕은 끄떡없이 잘 오른다고 했다. 솔직히 정말 한 번쯤은 운전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차였다. 두 명이 통근용으로 타고 다니기에도 딱 알맞은 크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봉사단원 신분으로 운전을 하는 건 규정 상 금지였기 때문이다.
OJT 기간에 학교에 간 건 딱 절반이었다. 당시 학교는 방학이라 학생들이 없었고, 선생님들도 우리가 첫날 도착했을 때 말고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교무실이나 교감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뿌뿌사를 먹었다. 교장선생님의 비서인 에리카와 스페인어를 주고받으며 현지어 연습을 하거나 학교를 돌아다니며 수업을 어떻게 할지 구상을 해보고 계획을 짜보기도 했다.
그밖에 시간에는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중남미는 살면서 접해본 곳들 중에서 가장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카메라로 무엇을 찍든 다 특별해 보였다.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해줬고, 빛이 좋고 현지인들의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그런지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나머지 절반의 기간 동안에는 교감선생님 롤리의 동행 하에 엘살바도르를 탐방했다. 산살바도르에 있는 미술관, 인공호수와 아기자기한 집들이 있는 마을로 유명한 수치토토(Suchitoto), 우리가 소야팡고에 살면 다니게 될 식료품점이나 쇼핑몰까지. 대부분 교감선생님의 아들 알레한드로가 동행하며 운전을 해줬다.
알레한드로는 교감선생님의 셋째 아들인데 외모에 관심이 아주 많고, 엄마의 말이면 끔뻑 죽었다. 교감선생님의 집안은 엘리트 집안이다. 남편은 국회에서 일하고, 첫째는 의사며, 둘째는 변호사다. 아레한드로는 대학생인데, 시각예술을 전공했다. 그는 아직 경제력이 없다 보니 용돈을 주는 엄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OJT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 파견됐을 때 살 집을 구하는 것이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은 단신부임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단원이 살 집도 스스로 구해야 했다. 동기 단원들은 벌써 집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크레스코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OJT 마지막 날 나는 봉변을 당할 뻔했다. 시차적응이 완전히 끝나서 초저녁 잠이 사라졌을 때였다. 마리오와 나는 무사히 OJT를 마친 것을 자축하기 위해 기숙사 공용 식당으로 가던 길이었다. 식당에 가려면 소파가 있는 통로를 지나야 하는데 문이 잠긴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문이 잠겼다는 건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니까. 무모하게도 내가 건물을 돌아 주방 쪽으로 가보려 시도했다. 건물 옆에 비탈이 있기는 했지만 약간의 틈이 있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모퉁이를 돌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분명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개들이 나를 발견하고 마구 짖어대며 달려든 것이다. 나는 개들을 보자마자 뒤로 홀라당 자빠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제 속수무책으로 물어뜯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어디선가 짧고 크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물고 훅 불어서 내는 그런 휘파람 소리였다. 그러자 나를 한 끼 저녁식사처럼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들었던 개들이 그대로 뒤를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 후 개들과 함께 경비아저씨가 나타났다. 러닝셔츠 차림의 경비아저씨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개들은 그의 뒤에서 좀 전에 내게 보였던 사나움은 감추고 헥헥 혀를 내밀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고 있었다. 뒤늦게 마리오가 모퉁이를 돌며 괜찮냐고 물어왔다. 나는 넘어지면서 복숭아뼈를 바닥에 찍혔는지 뒤꿈치로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경비아저씨는 내게 간단한 소독을 해주고 주방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는 밤에는 개들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오와 함께 주방으로 갔다. 이제 짧았던 OJT 기간을 뒤로하고 다시 유숙소로 가야 한다.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소야팡고에 지내면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바로 엘살바도르 사람들이었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벌써 수많은 얼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지 적응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마주할 얼굴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이 엘살바도르라는 게 실감 났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봉사단원 생활에 작은 기대가 생겼다. 물론 밤만 되면 전쟁이라도 하는 듯 울려 퍼지는 폭죽소리에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