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 체스로 바뀐 인생
체스는 가장 오래된 보드게임이다. 두 사람이 각자 16개의 말을 가지고, 64개의 눈이 있는 체스 판에서, 상대의 왕을 잡기 위해 머리싸움을 한다. 인도의 ‘차투랑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페르시아로 전래되었다. 무슬림들은 스페인으로 체스 게임을 가져갔는데, 11세기경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인도의 동쪽으로 전해져서는 우리가 잘 아는 장기가 되었다.
체스를 소재로 한 영화는 모두 천재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놀라운 솜씨를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들에게 체스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인생의 사다리가 되어주었다. 반면 심리적 압박도 대단하여 주인공들은 곧잘 좌절에 빠졌다. 천재적 재능이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면, 자기 파괴적 광기는 신이 내린 징벌과 같았다. "광기 없는 위대한 천재는 없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고뇌에 빠진 주인공들이 약물이나 술 등으로 일시적인 위로를 얻기도 하나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따름이었다. 관계는 망가지고, 더욱더 고립되었다. 고통과 혼돈에 빠진 이들에게 한줄기 빛이 있었다면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였을 것이다. 가족, 친구, 지인들의 응원은 빈자리를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고단한 세상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었다.
체스로 운명을 개척한 아이들
총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에 나선 아버지는 더 이상 방글라데시에서 살기 어렵겠다고 판단 내렸다. 아들 파힘을 데리고 인도 국경을 넘어 어렵사리 파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곧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한다. 거리에서 기념품과 꽃을 팔며 노력해보지만, 대회 당일까지도 체류증을 구하지 못 한 아빠에게 추방 통보가 떨어진다.
<파힘>(2019)은 체스 월드 챔피언이 되기 위해 방글라데시에서 프랑스로 온 소년의 실화를 담았다. 그는 11세에 프랑스 U12 체스 챔피언이 되고, 13세에 세계 주니어 체스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불법체류자로 살기란 쉽지 않다. 적십자 등 난민을 돕는 단체와 사람들이 있었지만, 엉터리 통역으로 곤혹을 치르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도 파임에게는 좋은 이웃들이 있었다. 불법체류자여서 자격이 없다며 거절하던 협회장에게 파힘의 스승 실뱅은 과거를 떠올린다. 협회장 역시 파시즘을 피해 알프스를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는 한 석수의 수습생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고, 그 석수의 딸과 결혼하여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가 경험한 관대함처럼 파힘에게도 기회를 주길 바랐다. 마틸드는 총리에게 “프랑스는 인권 보장국가인지 아니면 인권을 선포하기만 한 국가인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체스의 여왕>(2016)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피오나 무테시는 우간다 빈민촌 카트웨에서 사는 소녀이다. 가난하여 학교도 다닐 수 없는 처지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선교 프로그램을 통해 체스를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회에도 참가하게 된다. 14세에 ‘우간다 여성 주니어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고, 16세에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WCM타이틀과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피오나에게는 헌신적인 카텐데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빈민가 아이들은 질병을 옮길 수 있다고 반대하는 회장을 설득하고,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해 축구 게임에 용병으로 뛰기도 한다. 체스를 도박으로 오해한 피오나의 엄마에게는 개인교습을 약속한다. 좌절의 순간에도 피오나에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더 좋은 직장에서 제안이 오지만, 아이들을 위해 거절한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파리에서 장미꽃을 파는 파힘에게도, 우간다의 빈민촌에서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피오나에게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오늘 하루의 양식조차 부족한 아이들에게 체스는 사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 파힘과 피오나에게 체스는 희망을 이끄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이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힘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이들의 존재는 필수이다.
강박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체스 챔피언 스파스키와의 두 번째 체스경기를 앞두고 바비 피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시간 그는 자기 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바비는 혁명을 꿈꾸는 어머니로 인해 누구에게 감시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을 살폈다. 잠을 청하지 못 할 때면 두려움과 외로움을 체스로 떨쳐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비는 본격적으로 체스를 시작했고,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세기의 매치>(2014)는 미국의 체스 신동 바비 피셔의 생애를 그렸다. 그는 6세에 입문하여, 13세에 미국 체스를 제패했고, 15세에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제 남은 목표는 하나. 세계 정상에 오르는 것.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체스 황제 보리스 스파스키를 이겨야 한다. 승승장구하며 국제대회에까지 출전하게 되는데, 승부조작을 하던 소련 선수들을 보고 퇴장해버린다. 체스를 그만 두려 했지만, 그를 응원하는 이들의 도움으로 다시 복귀한다.
승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형성된 성격 때문인지 바비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혁명가 출신 어머니로 인해 감시를 받으며 자란 바비는 소련이 자신을 도청하고, 미행한다고 의심한다. 극도로 예민해진 바비는 공항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대회장이 아닌 탁구장에서 경기를 하겠다고 주장한다. 불안한 심리와 행동은 점차 편집증과 망상 증세로 나타난다. 체스는 웜홀과 같았다. 수많은 변수를 다 고려하자면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바비의 말년은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라운 승리를 거뒀으나 그의 정신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에게 쏟아진 광고들을 거절했고, 타이틀을 기권한 채 대중들 앞에서 사라졌다. 1980년에는 부랑죄로 체포되었는데, 감옥에서 고문당했다고 주장했다. 1992년 은둔생활을 접고, 베오그라드에서 스파스키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미국의 통상 금지령에 위배되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세계를 떠돌다 아이슬란드에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냉전시대에는 군비경쟁과 더불어 스포츠계에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나 올림픽은 메달 다툼을 통해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무대로 활용되었다. 금메달을 향한 엘리트 체육시스템은 선수 개인을 수단으로 여겼다.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적을 내는데만 집중했으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현재의 승부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체스도 같은 역할로 소모되었다.
1972년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 매치. 미국과 소련의 패권 다툼이 심했던 시절로, 바비와 보리스의 대결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간주되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지적 우수성을 과시하고 싶었고, 미국은 자존심 회복의 기회로 삼았다. 이제 선수 개인의 건강과 안녕보다는 승부에 대한 집착만이 남았다. 이는 바비와 스파스키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냉전시대의 희생자였던 것.
겉은 체스, 속은 첩보
1960년대 미소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불과 160km 거리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 것.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의 군사활동이 증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 준비로 여겨졌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미소 간의 가장 위험한 냉전 분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콜디스트 게임>(2019)이 만들어졌다.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교수 조슈아 맨스키는 한때 체스 최강자였다. 그 사이 인생에 굴곡이 있어 노벨상 수상자인 동료를 폭행한 이유로 해직되기 이른다. 술집에서 카드게임으로 전전하던 맨스키에게 어느 날 CIA가 찾아온다. 바르샤바 주재 미 대사관에 갇힌 그는 체스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코닉스버그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레 사망했고, 그를 대신하여 대회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받는다.
영화는 1962년 폴란드에서 열린 미국과 소련의 체스 대결을 주무대로 한다. 체스대회는 국가 간의 평화와 우정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선전되었지만, 실상은 치열한 첩보전이었던 것. 소련의 챔피언에 대항하여 미국은 천재 수학자 맨스키 교수를 투입한다. 그의 역할은 체스 경기에 임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요원에게서 비밀 정보를 넘겨받는 것이다. 체스와 스파이, 이중의 두뇌 게임이 시작된다.
맨스키는 13세 때 체스대회에 데뷔한 신동이었으나, 현재는 기행을 일삼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시합의 첫수를 두는 세리모니에서 자기 차례에 응수하지 않고, 갑작스레 무대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그의 첫수로 인해 8,900가지 대응책이 떠올라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어 열린 첫 번째 경기는 본인이 승리하고도 경기를 기억조차 못 했다. 너무 취했기에.
백중세의 체스 경기가 계속되는 동안, 외부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수를 돕던 요원이 독살되는 일이 벌어지고, 방사능 물질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배가 쿠바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맨스키는 대학시절 물리학자 친구를 도운 기억을 떠올린다. 방정식의 실수를 대신 해결해줬을 뿐인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는 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체스로 인해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위치에 서게 된 그는 자신만의 경기를 할 것임을 천명한다.
사랑과 지지로 얻는 자유
처참한 사고 현장, 그 곁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여자 아이. 경찰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하는데, 9살 소녀는 엄마를 잃었음에도 울지 않는다. 고아원에서는 약을 두 알씩 분배받는다. 초록색은 온화한 성품을, 주황과 갈색은 튼튼한 몸을 길러준다고 했다. 알약을 먹자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도 못 한다. 비타민제라고 하지만 실상은 안정제였다.
수학 시간, 남들보다 먼저 문제를 푼 하먼은 지하실에서 분필 지우개를 털게 되었다. 거기서 보육원 관리원인 샤이벌 아저씨를 만나 처음으로 체스를 접하게 된다. 초록 약을 먹은 하먼에게 천장이 체스판으로 보인다. 저녁마다 약을 몰아먹고, 머릿속으로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아 관리인을 압도하고, 체스 동아리 고등학생들을 다면기로 상대하여 승리한다.
<퀸스 갬빗>(2020)은 체스 신동인 엘리자베스 하먼을 주인공으로 한다. 어린 시절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던 하먼은 체스를 두며 어두운 터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던 어느 날, 아저씨는 베스에게 체스와 관련된 책을 선물한다. 자신이 그만큼 잘하는 건지 궁금한 하먼은 아저씨에게 묻는다. 아저씨는 베스의 나이를 묻더니 놀라운 실력이라고 칭찬해 준다.
하먼은 1960년대 코넬 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딴 엄마에게서 수학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또한 엄마의 정서적 불안과 기이한 행동도 보며 자랐다.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경험하지 못 한 하먼은 일찍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다. 법이 바뀌어 고아원에 더 이상 안정제가 공급되지 않자 금단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약물은 집중력을 높여주고 불안감을 떨쳐내 주지만 의존성도 함께 주었던 것. 성장해서도 약물에 빠져들었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다. 중독은 일시적인 위로와 안정을 주는 듯했으나, 결국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지켜봐 준 샤이벌 아저씨와 친구 졸린의 애정을 확인하고야 벗어날 수 있었다.
'퀸스 갬빗'은 잘 알려진 체스 오프닝 중 하나이다. 첫 수로 퀸의 앞길을 터준다. 상대가 대응을 해 오면 각각 폰을 하나씩 주고받는 순이지만, 길이 트인 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중원을 장악하여 공격의 주도권을 얻게 된다. '퀸스 갬빗'은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시적으로 희생처럼 보이지만, 전체 포지션상으로는 이점을 가져간다. 하먼도 체스를 통해 성장하면서, 때로 무언가를 잃고, 때로 다른 것을 얻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장해갔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