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24절기 그리고 나의 24절기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초대권을 받아 관람 후 느낀 바를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가을 타나 봐’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여름을 싫어하면서 여름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살피다 도리어 계절의 변화를 더 체감하고 말았다. 필자는 가을을 탄다기보다 환절기를 탄다는 쪽에 더 가깝다. 환절기가 되면, 체력이 떨어지고 멍때리는 순간이 늘어난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집중력도 떨어진다.
새 계절이 왔다는 건,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뜻이며 나이를 먹는다는 걸 알기에 환절기가 다가오면 서글퍼진다. 가는 계절이 아쉽다기보다 지나가는 나의 시절이 아쉬워 괜히 계절의 발목만 잡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는 유난히 힘들어한다. 좋아하는 가을과 겨울이 와서 기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매년 겪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런 나에게 딱 맞는 공연을 발견했다. 홍콩댄스컴퍼니 대형 창작무용극인 ‘천상의 리듬을 담은 춤 - 24절기’이다.
24절기에서 절은 인간을, 기는 자연을 상징하며, 중국인들의 삶과 지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 정취와 현대의 시각이 조화롭게 담겨 있어서 홍콩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절기마다 변화하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몸짓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무용극이었다.
막이 오르자 흰 천을 두른 무용수가 등장하면서 편백 향이 진하게 퍼졌다. 시작하자마자 공연장 안을 가득 채운 향기는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전에 관람했던 전시회에서 향기 연출에 크게 실망했었는데, 그 아쉬움을 여기서 달랠 수 있었다.
한편, 좋은 추억도 떠올랐다. 영화 알라딘을 5D로 관람했던 기억이다. 그때 바로 옆에서 느껴졌던 향이 매우 좋아서 한동안 그 향과 비슷한 향수를 찾아다녔다. 아직도 영화 알라딘을 생각하면 스토리가 아닌, 매력적인 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처럼 향은 사람뿐만 아니라 작품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긴 여운을 남긴다. 이번에 관람한 ‘천상의 리듬을 담은 춤 – 24절기’ 공연도 그러했다. 공연 내내 코끝에 향기가 머물렀다. 편백 향을 비롯해 꽃 향, 풀 향, 차가운 향으로 계절마다 달라졌다.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몸짓과 냄새를 향유하니 사계절을 한꺼번에 경험한 것 같았다.
극은 다양한 연출로 계절의 변화를 나타냈지만, 그중 향기에 가장 많이 공감했다. 계절의 변화가 가장 빠른 것은 냄새이며, 나 또한 후각을 통해 환절기를 알아챈다. 길을 걷다가 또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들어오는 각 계절의 냄새가 느껴지면 ‘또 한 계절이 가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필자는 환절기를 탄다.
공연을 보면서 절기의 변화를 매우 섬세하게 발견하고,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짓뿐만 아니라 향기, 음악, 의상, 조명을 활용하여 표현한 덕에 오감으로 계절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인상적인 장면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 세 가지만 꼽아봤다.
1. 시작
누워있는 무용수들을 덮고 있는 흰 천, 그 흰 천을 두른 우뚝 서 있는 무용수가 등장했다. 중앙에 있는 무용수의 몸짓에 흰 천이 걷히면서 무용수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피더니 무언가에 반응하듯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릴 적에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다. 땅 위의 눈이 녹으면서 새싹들이 나오고,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는 영상이었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 자유로운 몸짓은 마치 탄생하기 위해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려는 노력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이 성스러웠다. 동시에 무용수의 춤, 연기가 아닌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인 순간이었다.
2. 과정
시작과 끝 사이에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건 자연도 마찬가지였다.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단단한 땅을 뚫고 나와야 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꽃이 피고 난 뒤에는 살랑이는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즐겁게 세상을 구경한다. 나무들은 단단한 가지 안에서 이파리가 돋기 위해 노력하고, 나뭇잎이 된 후에는 뜨거운 햇빛과 맑은 빗물을 만나며 행복을 만끽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뭇잎들은 다른 색의 옷을 입는다. 살랑이던 바람이 날카로운 바람이 되고, 이에 못 견디고 꽃과 단풍은 지고 만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을 때, 생물들은 따뜻한 땅속으로 피한다. 이 모든 과정을 몸부림치는 듯한 몸짓, 의상을 활용한 군무로 표현했다. 한편, 인간은 씨앗을 뿌리고 잘 클 수 있도록 보살피며 식량을 생산시키고 저장하는 과정도 담아내어 자연과 인간의 24절기를 함께 볼 수 있었다.
3. 끝, 새로운 시작
긴 겨울의 끝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첫 장면처럼 흰 천이 다시 무대 위에 깔렸다. 한 무용수는 그 천을 찢고 나와 몸짓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표현했다. 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고,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자연의 섭리임과 동시에 인간의 삶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24절기를 어떻게 표현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펄럭이는 의상으로는 거대한 바람을, 소품으로는 흩날리는 낙엽이나 꽃잎을, 흰 천으로는 눈, 계절의 냄새는 향으로 표현하는 걸 보면서 예술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공연장에서 나와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색의 초록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은 어느새 옅은 초록색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빨간 물이 든 나뭇잎도 있었다. 해가 짧아져 초저녁인데도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코끝에는 가을 냄새가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의 냄새를 맡고 나서야 주위를 관찰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먼저 나서서 계절의 변화를 눈에 담았다.
필자의 tmi
아트인사이트에 지원할 때, 문화예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적었다.
[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 조명이라고 말하는데요. 그만큼 어떤 조명을 쓰느냐에 따라 집안의 분위기를 180도로 바꿔줍니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것을 어떤 집에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문화예술도 그런 게 아닐까요? 저마다 고유의 색과 모양,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 가냐에 매력이 확 달라지곤 하죠.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의 영화를 가지고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매력을 느끼기도 하죠. 그런 것처럼 문화예술은 조명과 같아서 어떤 사람한테 가냐에 따라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처럼, 문화예술은 향유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매력이 달라진다. 더 깊이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의 가치관, 안목, 상황에 따라 작품은 재해석 된다. 동일인물이어도 당시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어릴 때 봤던 작품을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처럼 말이다.
24절기에 담긴 시작, 과정, 끝, 또 다른 시작의 흐름이 내 여정과 같아서 깊이 공감하며 봤다. 그래서 흰 천을 뚫고 새로운 만물이 탄생하는 마지막 장면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자연과 인간의 24절기보다는 나의 24절기를 담은 공연을 보는 듯했다.
나에게도 그 장면과 같은 날이 올까.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처럼 나도 알을 깨고 나와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트인사이트 : https://www.art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