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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스 else Dec 27. 2023

나의 영어 선생님을 다시 만나다

건강한 어른과의 대화에서 다시 배우는 인간관계


얼마 전, 한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짤막한 메시지였다.


요새 들어 주변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잘 못하는 나였기에 그 문자는 놀라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예전 영어 선생님이 나를 잊지 않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에도 초대를 받아 선생님의 가족을 만나기도 하는 등 나름 친밀한 관계였지만 학원에서 만난 사이였기 때문에 내가 학원을 끊고 난 이후로는 가끔 연락한다 하더라도 자주 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지난 몇 년간은 건강 때문에 시작된 나의 은둔 생활로 인해 더더욱 선생님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우리의 연락이 이어지기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사실 선생님이 나를 잊었을 줄 알았다.


때문에 선생님의 생일 축하와 시간 되면 얼굴 한 번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더더욱 감사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을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잊지 않고 다시 연락하여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밀린 근황 이야기 나누며 올해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비록 영어로 대화 나눈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이따금씩 내 뇌는 오류범벅으로 뒤덮였지만 희한하게도 책에 나올 법한 어려운 영단어는 비교적 빠릿빠릿하게 기억해 내면서 Enough, Hope와 같은 매우 쉬운 단어는 반대로 바로 기억해서 말로 내뱉지 못했다.


예전처럼 영어 공부를 각 잡고 하진 못해도 감이라도 안 잃어버리려고 유튜브를 통해 영어 관련 영상은 많이 찾아보곤 있어서 정제된 단어는 머릿속에서 유지되었지만 일생 생활 대화에서 흔히 쓸 법한 단어는 오히려 쓰고 접하는 빈도가 떨어지니 이런 역현상이 일어나게 된 거 같았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러하지 않을까.


예의를 한껏 올려 차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편안하고 친근한 만남 자리를 갖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더불어 세간에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더라도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바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절친 사이라고들 한다.


선생님과 나는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영어권 나라에서는 '친구' 맺는 것에 꼭 동갑일 필요가 없다는 점과 영어는 '존댓말'이 없다는 것에서 더더욱 선생님을 만났을 때 마치 학교 졸업 후 오랜만에 동기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국 문화에 더 익숙해지신 느낌이고 본인도 한국어 공부는 계속하고 있지만 듣기는 50% 이상 실력이 늘었어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며 오랜만에 영어 문장을 내뱉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


대부분의 우리들 이야기는 별 엄청난 이벤트가 있다던가 한 게 아닌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 뿐이었지만 묘하게 그것이 더 나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새삼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하구나 싶은 감정 말이다. 이에 연락을 먼저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내 건강에 집중하느라 먼저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것에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니 선생님은 (듣기 실력도 많이 떨어져서 의역이 있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걸?

모두들 각자 삶에 바쁘고 시간 되는 누구나가 먼저 연락할 수 있는 거란다.


그렇게 연락해 봤을 때 너처럼 이렇게 화답해 주면 다시 관계가 이어지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거기서 끝일 뿐이란다.


또 막상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먼 훗날 내가 보낸 연락을 기억하고 다시 되찾아온 사람도 있고 삶의 모습이 각양각색이듯 연락과 관계의 형태 또한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닌 경우도 많단다.


너무 신경 쓰지 마렴.

너의 입장에선 당연히 건강 회복이 우선이었으니 말이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다시 이렇게 만났고 지금 같은 장소에서 대화하고 있는 거란다!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 머리로는 이런 생각이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건강한 태도라고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나라면 몇 번이나 자신이 먼저 연락을 취했던 후배에게 반대로 한 번도 (흔히 '선톡'이라 불리는)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얘한텐 내가 딱 이 정도 인연이었구나?' 하고 괘씸해하며 혼자 상처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을 텐데 싶었다.


그러다 보니 내 지난날의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는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더라.


요새 인터넷이나 SNS 등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 거르는 법, 손절해야 하는 사람 등 인간관계 기준을 세운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 논리대로 따진다면 사실 나 또한 건강상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손절당해야 할 사람의 범주 안에 든다.


그런데도 선생님과 같은 내 주변 어른들과 지인, 친구들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안부 묻는 연락을 해주었다. 만약 주변인들이 내 사정을 모르던 때에 단순히 내가 장기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하는 법도 없으니 나를 손절할 애로 치부해 버렸다면 어쩔 뻔했을까 하며 아찔해졌다.


요새는 그래도 전보다 몸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컨디션이 좀 괜찮을 때 한 명씩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할 때도 생겼다. 선생님과의 만남 후 오랜 기간 왕래가 없었던 내 다른 친구가 떠올라 연락해 보니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 친구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냐면서 사업에 바빠 나와 연락을 못한 지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나 선생님 말씀처럼 정답은 없었다.


그 친구와도 아주 오랜만에 만나기로 날짜를 잡았으며 우리는 그렇게 친구란 인연의 끈을 계속 연장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접한 분들도 현재 생각나는 인연이 있다면 한 번 연락을 취해보시길 바란다.

나의 사례처럼 호의적인 답장을 못 받을 수도 있고 되려 읽씹 당할 수도 있다.

그럼 그때 가서 단념해도 되고 읽씹 당했다 하더라도 사정이 생겨서 당시 답장을 못했다며 미래에 다시 연락이 올 수도 있다.


딸기크림빵 캐릭터처럼 눈치 보지 말기!


물론 본인을 너무 괴롭게 만드는 인연은 과감히 손절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겠지만 나와 같이 너무 오랫동안 연락도 안 했는데 이제 와서 연락하는 게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을까 싶은 고민을 하신다면 스스로 관계의 손절을 치지 마시고 용기 내어 연결고리를 한 번 던져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소중한 인연들과 연말연시 그리고 새해의 새 출발을 모두에게 응원드립니다.



*표지 / 본문 이미지 출처 - Freepik Free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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