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장애 극복기 1 - 외국에서 온 한국인

by elsewhere
나는 평소에 빌딩 사진을 찍는걸 좋아한다.


이 글을 내 소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열심히 노력은 해보겠지만 간간히 틀린 문구나 문법이 있으면 지적해줘도 좋고, 그냥 넘어가줘도 좋다.


제목에 적혀있듯이, 나는 어린시절부터 외국에서 살아왔다. 영어권 나라였다. 처음에 외국에 뚝 떨어졌을 땐 정말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고, 선생님이 하는 말도, 친구들의 장난끼 어린 말들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힘든 환경에서 나는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원래 생존 영어가 가장 좋은 영어 공부법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가장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노력했고 그 결과 고등학교 시절에는 영어 수업시간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대학도 영어권 나라로 갔다. 그 때 나는 이미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미국 대학들이 그러하듯 내가 다닌 학교도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상하게 나랑은 영 맞지가 않았다. 그 때문일까. 2명의 한국인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지냈다. 현지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현지의 문화에 스며들어갔다.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점심은 부리또나 햄버거로 배를 채우며, 저녁에는 무조건 술 한 병씩 사들고 친구네 집에 가서 파티를 열곤 했다. (나는 맥주보다 샴페인을 선호했다) 돈이 부족한 대학생 신분이니 술은 가장 싼 걸로 고르고.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정신적인 혼란이 왔다. 방학을 맞아 가족이 있는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였다. 그 당시 모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적응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바로 정신과로 향했다. 정신과에서는 우울증이라는 판단과 함께 상담치료를 시작했다.


어느 누구는 상담치료가 정말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상담치료는 또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었다. 자그마한 방에서 쏟아지는 한국어를 바로바로 이해하고 내 마음을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익숙치 않은 상황이라 집중조차 어려웠다. 아마 정신이 온전치 않아 집중이 잘 안 된 것도 있겠다. 결국 나는 별 소득 없이 10회의 상담을 끝으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신질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신착란이라고 하나? 무언가 보이고, 들리고. 자살충동이 자꾸 들고 매일매일 학교 아니면 자취방에만 머물렀다. 불쑥 찾아오는 공포감은 나를 짓눌렀고, 나는 참다못해 학교의 카운셀러를 찾았다.


카운셀러에게 모든 증상을 다 말했다. 카운셀러는 조용히 내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물어보더라.


"정말 자살할 생각이 있는거야?"


"네"


"그러면 너는 큰 병원에 가야해. 자살하겠다는 말을 하면 법에 의해서 바로 병원에 이송된단다."


그렇다. 여기 법에 따르면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즉시 경찰과 응급차가 출동한다. 얼마 지나지않아 먼저 경찰이 와서 신분 조회를 한 뒤 구급차가 도착했다. 들것도 있었지만 내가 신체적으로 아픈건 아니었어서 그냥 걸어서 응급차에 들어갔다.


어쩌면 낯선 땅인 그 곳에서 나는 폐쇄병동에 머물렀다. 나를 찾는 친구들에게는 감기가 심해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달했다. 폐쇄병동에 아마 5일 정도 머물렀던 것 같다. 비싼 병원비와 응급차 비용은 보험으로 커버되지 않았고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시켜달라고 애원했다.


퇴원을 한 뒤에는 병원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거의 매일 병원에 들렀고, 내 상황을 알리며 제발, 제발 병원비를 깎아줄 수 없냐고 빌고 빌엇다. 하도 징징대니 병원 직원들도 나를 질려했다.


어느 날은 손편지를 썼다. 그 때가 아마 내가 너무나도 지쳤을 때였던 것같다. 손편지를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