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슈가 브런치 '있을 법한 이야기' 매거진은 소심하고 엉뚱한 화자가 보고 듣고 관찰하하고 경험한 이야기에 픽션을 더한 판타지 에세이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가지만 있을 법한,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유독 무더운 여름이었다. 평일에 이틀은 미팅이 있었고 3일 정도는 시원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일을 했다. 몇권의 책을 내서인지 작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서브 작가가 메인 업무고 가끔 잡지 등에 기고를 했다. 오전에는 주로 운동을 했다. 업무 특성상 앉아서 글을 쓰거나 긴 기획 미팅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체력 관리는 필수였다. 불규칙하게 자고 일어나고 불규칙하게 먹고 마셨던 날들도 있었는데 그런 생활 습관이 내 일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알게 된 후 잘 챙겼던 건 바로 점심이었다. 아침은 시리얼 과일 담백한 빵과 우유 등으로 먹었고 저녁은 가족들과 간단히 먹을 때가 많았다. 업무 시간인 오후 내내 에너지를 내고 끌고 가려면 점심을 잘 먹어야 했다.
그래서 종종 갔던 식당이 바로 거기였다. 수라간.
동네에 새로운 가게가 문을 열면 한 번쯤 가보곤 한다. 무슨 글이든 돈을 버는 글이면 쓰는 작가도 넓게보면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가게를 얻고 오픈을 하면 한 번은 꼭 간다. 이후는 별개의 문제지만.
수라간도 그렇게 가게 되었다. 만원이 안 되는 돈을 내면 갖가지 반찬과 국 두 종류의 밥을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는 한식 부페식당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반찬 가짓수는 다양했고 하나하나 맛있었다. 어떤 날은 뜨거운 국과 차가운 냉국 둘 다 나올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국과 별도로 잔치국수가 나오기도 했다. 밥은 늘 흰쌀밥과 잡곡밥 두 종류가 제공됐다. 주인은 나이 지긋한 여자 사장님이었고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손님 응대 홀 정리 등을 담당했다.
음식 종류가 아무리 다양해도 맛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붐비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반찬이 하나하나 맛있었다. 유독 맛있게 먹은 날은 내일은 또 어떤 찬이 나올까 기대되기도 했다. 내가 이 식당에서 유독 좋아했던 반찬은 통째로 튀긴 생선 튀김에 데리야끼 소스를 뿌려먹는 반찬과 마른 새우가 들어간 달달한 마른 김자반 무침이었다. 또 시원한 물김치는 얼마나 맛있는지. 늘 딱 알맞게 익어 나왔다. 동치미 국물 같은 국물이 너무 시원해서 전날 얹힌 음식도 다 내려가겠다 생각 들었다. 0죽에 나오는 기성품 동치미 국물이 인기라고 하던데 기성 동치미의 시원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선배, 이 집이에요. 여긴 오징어젓갈도 맛있어요. 허허"
"그래? 얼마나 맛있길래?"
동네 한식 뷔페집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렇게 맛있다고 해도 누굴 굳이 초대해 데려오지는 않는다. 동네 식당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반찬을 나만 먹기엔 아까웠다. 누군가 소개해주고 싶었다. 마침 근처에 사는 선배에게 톡을 보냈다. 마침 새 드라마에 들어가는 선배도 점심을 든든히 먹어야 할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러 번 사도 부담 없을 가격대였다.
"다르다. 맛있다. 또 오고 싶네"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선배도 맛있다고 했다. 이 별거 아닌 것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프리랜서 삶이란 그런 것이다.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이는 외로움, 무료함, 무기력함이 쌓이면 가장 큰 적이 된다.
"그럼 우리 일주일에 한 번은 여기서 먹읍시다"
"그래. 요일 맞춰 보자고"
주로 활동하는 지역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달랐지만 우리는 그날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식당에서 만났다. 밥을 먹고 커피 한잔은 국룰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반찬에 대해 복기했다. '나는 오늘 이 반찬이 특히 맛있었네', '어제부터 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마침 국수가 나왔는데 이거 좋은 신호 아니냐'며 그날 지나면 잊혀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 걸었다.
커피 값은 2500원. 커피 역시 모르고 한 번씩 가는 카페에서는 도저히 그 가격에 맛볼 수 없는 퀄리티 높은 커피라고 회상한다. 그 커피를 마시고 싶어 외부 미팅을 취소한 날도 있었으니까... 가만. 그러고 보니 수라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비 핑계를 대고 약속을 미룬 날도 있었던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나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온통 오후 작업 생각뿐이었다. 언제까지 써야 할 원고가 있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20~30분 걸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라고 믿으며 그날도 쌀밥 반, 잡곡밥 반 담아와서 꼭꼭 씹어 먹었었다. 내가 요리하면 이렇게 채소가 맛있지 않다며 여기에서 채소 반찬을 많이 먹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같은 손님 안 받아! 당장 나가, 나가라고!"
나는 핸드폰으로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작은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큰소리가 나니 이어폰을 빼게 되었다. 주로 주방에 있던 여사장님이 홀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고함은 어린아이를 데려온 3명 정도의 엄마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져다 먹고 남기면 다음 손님은 어떻게 하라고?"
"왜 반말을 하세요?? 남길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나가. 대접받으려면 대접받을 행동을 하라고!"
손님에게 저렇게까지 화를 낸다고? 그것도 다른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 음식을 남겼다고 그렇게까지 화를 낸다고? 나는 좀 의아했다. 그 손님 테이블을 보니 쌓여있는 접시마다 음식이 좀 많다 싶게 남기긴 했지만 시작하는 식당 주인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뒤로도 주인의 고함이 이어졌다. 그 고함을 뒤로 하고 그 손님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채 중얼중얼 거리며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갔다. 의아한 점은 또 있었다. 그 손님이 나간 후로도 주인이 한참을 혼자서 화를 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반기는 사람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소심한 편인 나는 그날 기억이 나서 한동안 식당을 가지 않았다. 그즈음 선배도 외근이 많아져서 자연스레 주 1회 수라간 회동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든든한 집밥이 필요한 날이면, 오늘은 꼭 든든하게 먹고 싶은 날이면, 다음 날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된 날이면 그 식당이 생각났다. 그래서 또 가게 되었다. 한동안 평화롭다 싶더니 문제는 갑자기 일어났다.
"남기지 말라고요!"
"아.. 네에 ㅜㅜ"
"손님이 남기면 다른 손님들이 피해를 봐. 그러니 남기지 말라고요!"
나에게도 드디어(?) 그날이 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누구나 한 번씩 무안을 당했지 하며 이 상황을 정당화하며 귀까지 빨개진 나 자신을 보호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럴 일인가 싶었다.
"제가 남기면 얼마나 남겼다고요? 접시 보세요. 양념이랑 고기 비계 남긴 것 밖에 더 있어요? 요즘 손님들한테 생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여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 집에 대한 내 애정, 소중한 사람을 데려왔던 내 마음이 다 부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더 남긴 30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는 아무 말 안 하더니 주인이 왜 오늘따라 유독 나에게만 이러나 싶었다.
그즈음 나는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일로 꾸준히 나랄 찾아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 일이 혼자서는 하기 힘들고 작가 한명을 뽑자니 조금 모자란 양이었다. 그래서 늘 챙겨야 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기획 회의에 참여해도 일로 성사까지 가는 경우는 반이 채 안되었다. 또 언제까지나 서브 작가만 할 건가 생각했다. 드라마로 영화로 머리를 올린 동료들은 많았다.
매일 노력하지만 언제까지나 갈아넣어야 하나 싶었다. 성과를 내면 내는 대로, 성과가 성에 안차면 안차는대로 '더 해! 더 해내란 말이야!'라는 소리가 외부에서, 내면에서 들리는 듯했다. 반면 남들은 쉽게도 성공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만 모르는 치트키를 남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처럼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어 들린 식당에서 주인에게 그런 고함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