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풍선 인형을 세우진 않더라도 'open'정도는 써놓을 법 한데 그런 게 없다. 간판은 또 어떤지. 건물 골조에 영문 흘림체 글씨 한줄 올린 심플한 간판이 멋스러웠지만 한눈에 상호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적당히 새롭고 적당히 궁금한
카페를 발견한 그날은 나처럼 커피 좋아하는 지인과 아침 산책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미 커피 한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들고 걸었지만 우리가 딱 들리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새로웠고 적당히 궁금했다. 커피를 들고 다시 각자의 일터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으므로 테이크 아웃한 커피는 아이스커피로 기억한다. 커피 리드도 특이했다. 40대가 되니 편한 건 긴 설명 없이도 대충 눈치로 알 수 있다는 점(물론 그 눈치가 틀릴 수도 있음을 늘 염두한다) 커피 맛은 밸런스가 좋은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맛이었다. 잠시였지만 들렀던 화장실에서 느낀 느낌 그대로였다.
내 화장실에 오염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곳곳이 모두 깨끗했다. 5성급 호텔 로고가 박힌 디퓨저가 구석에서 존재감을 뿜어 내고 있었다. 휴지통은 손을 가져다 대면 열리는 디지털식이었다. 수전은 하얀색이었지만 수도꼭지는 무광 블랙 색이었다. 쉽게 하기 어려운 선택지를 선택한 듯 느껴졌다.
그 뒤로도 뭔가 골몰히 생각할 게 있어 멍 때릴 일이 필요하면 그 카페를 찾았다. 전투적으로 일하는 카페는 따로 있었지만, 이곳이 주는 느낌은 달랐다. 주인 혼자 일하는 바(bar)는 넓었고 손님들이 앉는 테이블은 널찍했다. 애초부터 효율성을 따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공간이었다.
"사장님, 제가 오늘 혼자 왔는데 창가 자리(2인이 앉는 자리)앉아도 될까요?^^;"
"아 그럼요~ 저희는 편하게 머물다 가심 됩니다."
"그래도... 제가 혼자 와서요..."
"그냥 편하게 앉으심 됩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이 좀 너덜너덜해진 날이었다. 일이 잘될 때도 있지만, 어떤 일은 공을 들이고 수고를 해도 그에 비해 성과가 1/10도 안 날 때가 있다. 구구절절 설명할 여력도 없을 때, 나를 잘 알아보지 않는 공간에 15-20분 정도 머물다 오면 마음이 풀릴 때가 있으니까. 그게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잠을 잘 때도 있다. 늘 덮는 폭신한 이불 속에 쏙 들어가 한두 시간 자고 나면 그냥 문제가 풀려있곤 했다.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계획에 없던 지출이 갑자기 발생했는데 그 액수가 적지 않았다. '왜 나에게만?' 생각에 억울했지만 내가 어찌한다고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잠을 잤다. 자고 나니, '이만하길 다행이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소설책 가져가야지
남편이 저녁을 먹고 온다고 한 어느 저녁이었다. 아이 학원 끝날 시간까지 2시간이 남았었다. 낮의 전투적인 업무는 끝이난 상태였다. 문득 그 카페에 가고 싶어졌다. 어깨와 팔이 약한 나는 좀처럼 무겁게 물건을 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날은 꼭 그 두꺼운 소설책과 필사 노트를 가지고 카페에 가고 싶었다.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소설 소 챕터를 필사했다. 내가 좋아하는 대목 위주로 했다. 글 쓰는 것 밖에 달리 재주도, 할 일도 없다고, 앞으로도 계속 쓰고 또 쓸 거라는 작가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말줄임표에는 나도 따라서 더듬더듬 되뇌며 무뎌진 글씨체로 대화와 문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 괜찮아진 것 같은'마음 들었다.
비스코티와 고디바
그 카페는 매장에서 커피를 마시면 티푸드를 준다. 그렇게가 단돈 4천 원. 테이크아웃은 그 티푸드가 없고 3천 원. 월급 빼고 다 오른 물가에 이게 웬 너그러운 가격인가 생각 들었다. 카페 동선 배치부터 바(bar) 크기, 개업을 알리지 않은 것과 이런 메뉴 구성 등을 봤을 때 저 사장님은 이윤을 남기겠다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생각 들었다. 생각을 넘어 걱정이 되었다. 어찌해줄 것도 아니면서 오지랖이 발동하는 시점이다.
소설 필사를 하던 날 저녁, 나는 커피를 한잔 더 주문했다. 이렇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멋진 시간을 제공해준 것에 대한 내 마음이었다. 두 번째 커피는 이 집의 시그니처 커피. 에스프레소와 생크림으로 만든 달달한 커피를 주문했는데, 두 번째 커피의 티푸드는 어떻게 나왔을까? 나오긴 했을까?
몰두하는 바람에 그런 것 생각할 겨를 없었는데 나온 커피를 보니, 첫 번째 잔과 똑같이 비스코티 하나, 고디바 초콜릿 하나가 제공되었다. 비스코티는 담백해서 더 먹을 수 있었지만 초콜릿은 밤이라 안 뜯기로 했다. 하루치 카페인 량을 넘기도 했으니까.
그러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작은 크로스백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고디바 초콜릿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날은 잰걸음으로 다녀서인지 당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시켜놓을 여유는 없었다. 카페에서 파는 케이크들은 나에게 너무 달고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다. 남기기는 싫지만 포장해 온들 잘 먹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아쉬워만 하다 다음 끼니를 맞곤 하는데, 그때였다. 가방에서 작은 게 하나 만져졌다. 카페에서 받은 고디바 초콜릿이었다. 개별 포장된 사탕처럼 한 개씩 포장되어 있어 뜯어서 입에 쏙 넣기 좋은 초콜릿.
햇볕이 강렬했으므로 이대로 가방 속에 더 방치해둔다면 녹아서 먹기 애매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지금 먹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길 한쪽에서 서서 살살 뜯어 마스크를 내리고 입 속에 쏙 넣었다. 행복감이 느껴졌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한 번씩 선물이 주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2년 전 1월 국토부로부터 받은 문자가 그랬고, 1년 전 출간 계약이 그랬다. 또 몇 달 전 지금 일이 주어진 것이 그랬다. 고디바 포션 초콜릿도 다르지 않았다. 그 초콜릿은 그냥 초콜릿이 아니었다. 지금 인생이라는 미션을 열심히 클리어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준 작아도 달콤한 선물이었다. 그 카페가 좋아질, 또 가야 할 강력한 이유가 생겼다.
"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내 놓고 홍보하진 않지만 이 모든 것은 사장님의 지극 정성이었다. 며칠 뒤에 들린 카페는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