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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17. 2024

#1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

"나더러 부동산 실장을 하라고?"

회사에서 10년, 퇴사 후 자영업 11년, 총 21년을 일했다. 하던 일이 과부하에 걸릴 즈음 나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일을 하나 더 추가해야 했다. 


남편은 여의도 증권 회사 공채 출신의 증권맨이었다. 증권업은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직종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때가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장교 출신에 대인관계도 좋았던 남편은 직장 생활이 체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마흔 중반 즈음 양상이 달라졌다. 임원이 되거나 자리만 지키고 있는 꼰대. 그는 선배들을 이렇게 정의하곤 했다. 임원이 되는 자는 극히 소수였고 자리만 차지하는 꼰대가 되기 싫었던 남편은 회사를 그만둘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여의도에 공채로 들어와 20년 넘게 자신을 갈아넣었지만 돌아오는 건 없다는 상실감이 그 무렵의 그를 감싸고 있는 듯 보였다. 남편의 의사도 의사였지만 회사도 직원들을 마음 편하게 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남편이 술자리나 회식한 날 다음 날 기억도 못하는 심한 말들을 퍼붓는 게 힘들어서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 있던 날들이 많았다. 그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었는데 나도 그도 힘들었다. 나 또한 항상 돈을 벌고 있었고 통장에 찍힌 남편의 급여는 낮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월말이 되면 늘 빠듯했다. 아슬아슬했던 그의 회사 생활을 지켜본 나는 어찌 돼도 좋으니 남편이 퇴사하기를 내심 바랐다. 아파트를 담보로 받은 대출은 아직 큰 액수였고, 이래저래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지만 사람은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2021년-2022년 펜데믹으로 재택근무가 권장되던 시절. 남편은 중년의 수능이라는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더니 덜컥 자격증을 땄다. 공부 시작한 지 일 년 반만이었다. 마스크 없이 아무 데도 못 가던 시절, 그 해 여름은 연일 최고 기온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긴팔 양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 학원 마치고 돌아온 그는 마스크까지 흠뻑 젖어있기 일쑤였다. 자격증 취득 후 그는 지체 없이 퇴사하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수많은 사무소 매물을 알아볼 때 나도 함께였다.


비 오던 금요일이었다. 빌라가 즐비한 동네 길가에 낡은 부동산 자리 매물을 보러 간 날이었다.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남편도 나도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네를 몇 번을 도는 동안 빗발은 점점 더 세졌고 바람마저 불기 시작했다. 점점 세지는 바람에 우산 한 개는 뒤집혀 버렸다. 어느새 내 어깨도 남편 어깨도 흠뻑 젖어 있었다. 을씨년스러웠던 그날 우리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을 계약할 경우 바로 옆 호프집과 화장실을 같이 써야 한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남편의 퇴사와 개업이 나에게 미칠 영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내가 부동산 상담 실장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약이 좀 심하다. 부동산 실장(중개 보조원) 일은 내가 해온 일과 관련 없는 일이며 그렇기에 흥미도, 전문성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누군가는 적성에 맞는 일일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부동산 중개 보조원 업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생을 통틀어 한 번도 내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의 생계가 달려있기에 하고 말고의 문제 또한 아니었다.


나에게는 마흔 중반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마케팅 관련 현업에 바빠도 그 목표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이제 시작해도 될까 싶을 때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 한 발짝 다가가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몇 년 멀어지나 싶었다. 누군가 나서서 ‘이건 좀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본업에 새로운 일까지 더해진 정신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이러다간 내 삶이 빠르게 떨어지는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훅훅 가버리겠구나 싶었다. 오전에는 부동산 실장 일을 하고 저녁까지 밀려있는 본업을 하고 쓰러져 잠드는 일, 자고 일어나면 스타가 생겨나는 필드에서 나만 도태된 것 같은 불안에 떠는 일, 새로운 강의를 끊임없이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정작 실행하지는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일, 실제로 꽤 많은 일들을 소화해 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나는 무능력하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자책하는 일. 나는 그해 여름, 온몸으로 이것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학습된 무기력 속에서 버둥거리던 중 신호가 찾아온 건 8월,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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