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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조카방 인테리어에 담긴 비밀

친애하는 나의 구닥다리 가족

by 엘슈가

“S야 이모가 작은 가구 하나 사줄게. 여기서 골라봐”

조카의 이사가 정해지자마자 나는 신이 나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이 많은 친정 오빠가 참한 베필을 만나 평생을 아버지와 살던 집을 떠나 (근처이긴 해도)따로 사는 게 결정되었을 때, 겉으로는 “오빠 축하해. 오빠도 하고픈대로 살아야지. 오빠만 부담을 지면 안 되지. 잘 결정했어요”라고 말을 건넸으면서도 한편으로 평생 아들과 살아온 친정아버지는 어찌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엄마와 친정 오빠와 살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오빠와 단둘이 살다가, 오빠가 새언니를 만나면서 혼자 살게 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이런 우려가 우려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혼자 지내신지 3개월 쯤 되었을 때였다. 두 달 여만에 내려간 친정집에서 본 아버지는 수척해 있었다. 이유를 여쭤봤더니 “요즘 입맛이 도통 없어서…” 말꼬리를 흐리신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주말에 내려가 아버지 식사할 거리와 과일, 두유 같은 걸 챙겨 왔던 나는 그날도 묵묵히 먹거리를 챙길 뿐이었다. 올라가는 길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탐스럽게 잘 익은 토마토와 20개 들이 요구르트를 사서 안겨드렸다. 차를 돌려 돌아간 아파트 입구에는 아버지가 아직 서 계셨다.


“아빠 의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토마토래요. 매일 아침 꼭 갈아서 드세요. 다 드셨나 검사할 거예요”


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지만 나는 이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고맙다, 막내야. 꼭 챙겨 먹을게"


그런데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다니는 조카가 그런 외할아버지와 살겠다고 돌연 선언한 거다. 안 그래도 자기 밥벌이를 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이모의 눈에 예뻐 보인 조카였다. 나는 그 마음을 조카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뭘 사줄까 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수납장’. 훗날 조카가 이 집을 떠나 살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이모의 마음을 한번쯤 떠올려 주기를 바라서 였을까? 그깟 가구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니 조카 이사 얘기만 나오면 자꾸만 센치해지는 나도 참 문제다.


데코라고는 1도 없는 외삼촌이 쓰던 무색무취의 방을 향기 나는 20대의 조카의 방으로 바꿔주기 위한 나의 프로젝트는 3~4주에 걸쳐 진행되었다. 조카를 떠올리며 하나둘 모아둔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친정집으로 배송해 두거나 내려갈 때 가져갔다. 나만 노력한 건 아니었다. 친정 오빠는 튼튼한 매트리스를 사주었고, 엄마인 막내 언니는 커튼을 담당했다. 조카의 취향을 반영해 깔끔한 화이트로. 하루는 날을 잡고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아웃렛에 갔을 때 였다. 나는 조카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S야 너 가지고 싶은 거 다 담아, 이모가 다 사줄게! 오늘 이모가 플렉스 한다!”


가격대가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기도 했지만 그 때의 내 마음이었다. 순전한. 그때 만큼은 조카에게 다해주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꾸미거나 숨기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조카의 이 결정이 조카는 물론 우리 가족 모두에게 두고두고 흡족한 결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효도를 조카가 아버지께 해드리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 그래서 고맙고 기특하다는 생각.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었다.


‘왜 우리 조카는 할부기(외할아버지)와 산다고 선언한 걸까? 그것도 별안간...’


그건 일단 조카 방을 예쁘게 꾸미고 나서 그때 물어보자. 그때도 늦지 않을 테니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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