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냥 좋아하는 줄 알았어
"호강시켜 줄게"
외모부터 듬직한 그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알고 있었던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세련된 단어보다 '호강'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아가씨였다. 그것이 청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섯 남매 중 막내. 아버지는 성실의 아이콘이셨다. 늘 열심히 일하셨지만 대체로 절약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접고 사업도 하셨었다. 어떤 때는 돈이 잘 벌려서 엄마의 화장대 첫 번째 서랍 안 흰 봉투에 현금이 두둑이 있었던 때도 있었으나, 한때였다. 막내인 나는 그 현금을 가장 많이 썼던 아이였다. 그건 행복했다.
옷이며 학용품을 언니들에게 종종 물려받곤 했던 여자아이는 결혼을 한다면 좀 풍족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잘 설계된 밑그림이라기보다는 '공주님이 되면 예쁜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하고 순수한 바람이었다.
현실감각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막연히 배우자는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했으니까. 은행 다니는 사람은 돈이 많다? 고 생각할 만큼 그런 부분에 관심도, 욕심도 없었다. 그저 궁색한 삶은 싫었다.
소개로 만난 남편은 첫인상에서 귀티가 났다.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금융권 회사를 다닌다고 했다. 늘 웃어주었다. 데이트할 때마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커피를 사서 기다려 주었다. 비 오는 날은 종로까지 데리러 오곤 했다. 단지 20분 걸리는 집에 데려다주려고 왔다. 결정타로 '내가 호강시켜 줄게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연애를 한 뒤 결혼했다. 이토록 나를 사랑해주는 은행 (비슷한)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라니. 나는 내가 결혼하고 나서 너무 빨리 부자가 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철없는 아내였다.
남편의 일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일에 가까웠다. 명석함과 신뢰만큼 체력도 중요했을 것이다. 업무량도 많고 약속도 많았지만 남편은 그에 비해 생기가 넘쳤다. 또래에 비해 승진도 빠른 편이었다. 대기업인 회사에서 관리하는 공채 출신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일과에서 '일'을 빼놓는다는 건 사실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한적도 별로 없었다. 그는 일과 친했다. 그렇게 그의 삼십 대는 일과 함께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에겐 여우 같고 강아지 같은 아이도 생겼다. 서로가 바쁜 것 빼고는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남편은 퇴근해 돌아와 또는 주말에, 여느 남편들처럼(아닌 남편들도 많지만...) 거실 소파를 점령하고 TV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을 쉬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직장을 다니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나는 남편의 그런 휴식에 대해 관대했다. 나는 남편이 없을 때 쉬면 되었다. 그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서 다툼은 없었다.
남편이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에는 '선을 넘는 녀석들'이란 프로가 있었다. 설민석 씨, 전현무 씨, 유병재 씨 등이 출연해서 우리나라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를 찾아간다는 취지의 예능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이 자주 보니까 틀어져 있으면 나도 따라 보게 되는 것이지 나는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예능이나 음악 프로를 좋아한다.
선을 넘는 녀석들을 보는 남편은 종종 그러다 잠이 들었다. 초반에는 딸아이를 불러서 '좋은 프로니까 아빠랑 같이 보자!' 할 때도 있었지만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엔 어김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한때 좋아하는 프로를 보다 잠드는 게 그의 휴식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여보, 집 앞 호프집인데 지랑 지금 나와"
남편이 오면 함께 식사하려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는 중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꽤나 요리를 잘하는 아내 같다. 오해가 생길 것 같아 말씀드리면 그건 아니다. 요리 잘하는 양처와는 거리가 멉니다만...
그만큼 공들여(?) 준비했던 저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오지 않고 집 앞 호프집으로 나오라니? 그것도 아이랑 함께-
바깥은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었다. 슬리퍼 차림으로 집 앞 생맥주 집에 가니 남편은 맥주에 피자에 나초를 잔뜩 시켜놓고 있었다. 이미 볼과 이마가 빨개져 있었다.
"맛있지? 많이들 먹어~ 아빠는 이 시간이 젤로 좋다~!"
"조금만 마시고 얼른 집에 가자!"
"지야, 넌 꿈이 뭐야? 되고 싶은 거? 나중에 어른되면 응?"
"아직 없어요...!"
"엥? 아직 꿈이 없어? 꿈이 없어서 어떡해?!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가 좋았어 너~~~~~~무 좋았어. 그래서 일요일에 성남에서 전철 타고 광화문 00 문고에 가서 종일 책만 봤어. 두꺼운 역사책은 사려면 많이 비쌌거든. 아빠는 역사 중에서도 발해 역사를 그렇게 좋아했어.
어떤 날은 서점에서 두꺼운 발해 역사책을 막 보고 있었는데, 어떤 어른이 다가와 그러는 거야~ 초등학생이 이런 책을 다 읽냐고 대단하다고. 아빤 그게 대단한 것인 줄도 몰랐어.
아빠는 나중에 꼭 역사공부를 할 거야. 지금은 직장 다녀서 못하지만 조만간 꼭.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아빤 그날부터 종일 역사책만 볼 거야. 그러니 우리 딸 지야~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오빠, 선 넘는 녀석들처럼 그런 거 하고 싶어? 그래서 그 프로 좋아하는 거야??”
"그 녀석들(?)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난 정말 역사 공부를 좋아해서 24시간 역사책만 보라고 해도 할 수 있는데. 정말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선 넘는 녀석들보다 진짜 잘할 수 있다고! 설민석 그 자리가 내 자린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림직한 아빠의 일장연설로 들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딸아이는 그렇게 들었을 것이다. 나는 마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사람이 이렇게 회사 다니는 걸 힘겨워했었나? 회사를, 일을 좋아해서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남편도 이렇게 회사를 참고 다녔다니. 일 빼면 시체인 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것도 까맣게 몰랐다니...
선을 넘는 녀석들은 또 어떤가. 마냥 그 프로를 좋아해서 몰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TV를 보는 그의 눈 이면에는 부러움이 있었다. 질투의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왜 역사학자가 되지 못했나?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을 넘는 녀석들은 몇 개의 시즌을 이어갈 만큼 인기 프로였다.
코로나가 침투 안 한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서울의 40대 회사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는 더욱 치열해져 갔다. 물가와 집값은 오르는데 월급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같은 월급을 받아오기란 더 어려운 일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 몇 달 남편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생전 안 하던 '힘들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침이면 신바람이 나서 출근하던 사람이 힘없이 출근한 날들도 있었다.
워낙 체력도 좋고 무던하고 우직한 사람이라 그런 면은 걱정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그도 변한 것 같았다. 그도 어느덧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언니,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언제 제가 이런 말 한적 있어요? 저 정말 성과 내고 싶어요. 경제적 자유... 저도 누리고 싶어요. 지금도 잘되고 있지만 더 잘하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뭔데?"
"그건..."
멘토로 생각하는 선배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용건을 마치고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나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정작 선배님께서 '뭔데?'라고 물으니 답을 하지 못했다.
"호강시켜 주려고요. 남편은 늘 회사를 다니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어요. 일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일을 관두면 저 사람 뭘 하나? 생각할 정도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잘...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남편도 사람이었어요. 저처럼 꿈이 있는 사람이요. 16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나는 내 꿈을 좇고 있었어요. 정작 나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남편은 그러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늘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요 언니 저 돈 벌고 싶어요. 그가 저에게 결혼하자고 했을 때 했던 말처럼, 이젠 제가 남편을 호강시켜 주고 싶어요. 언니 저 잘할 거예요. 제 방식대로 제 속도대로, 제가 그동안 갈고닦은 노하우로 더 많은 사람의 성장을 도울 거예요. 총알처럼 빠르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어떤 방법보다 빠르게 되어 있을 거예요. 언니, 저 할 수 있겠죠?"
전화는 끊겨 있었다. 나는 이 긴 말들을 누구에게 했을까? 핸드폰 액정 위로 툭툭 투투 툭- 투명한 무언가가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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