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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언젠가 지하철에서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한 팝 밴드의 노래였는데, 보컬의 담담한 목소리로 전달되는 가사 한 줄 한 줄이 너무나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어째서 ‘심금을 울리다’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때의 감정은 감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질투, 훌륭한 가사에 대한 시샘에 가까웠다.
알고 있다. 그다지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라는걸.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직업병 비스므리한 게 생겨났다. 재미있는 작품을 보고 나면 ‘이게 왜 재미있었는지’ 분석하게 되었다. 작품의 설정은 물론 문체, 캐릭터의 성격, 전개 방식, 복선 회수 방법 등등.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조립해가며 어떤 부분이 어떻게 재미있었는지를 연구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동종업계(?)인 소설을 읽을 때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점차 장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의도와 연출 방식을, 노래를 듣고 나면 곡 진행과 가사를 곱씹었다. 그러다 보니 감상이 끝나면 늘 감동이나 재미보다는 물음표가 남았다. 어떻게 이런 연출을 떠올렸을까,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가사를 생각해냈을까 등등.
느닷없이 생겨난 습관이었지만 나름 도움이 된 적도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서워할 ‘백지에 첫 문장 쓰기’가 조금 수월해진 것! 훌륭한 작품은 대부분 인상적인 도입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의식하며 작품을 감상하니 글을 쓸 때 나름 만족스러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석은 길어졌고 어느 순간 작품 감상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부담이 될 정도였다. 작품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전에는 없던 질투마저 생겨났다. 나도 이렇게 멋진 작품을 내야 할 텐데, 나도 이렇게 울림이 있는 문장을 써야 할 텐데, 하면서.
항상 무언가 틀어져 있던 휴일 풍경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늘 켜져 있던 태블릿PC는 일주일 넘게 방치되었고, 귓가를 떠나지 않던 이어폰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대신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감상이라는, 나름대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취미 하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는 편이 내 작품 활동에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부담이 줄면 글도 스르륵 써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예상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깨져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내게 휴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트레스가 날이 갈수록 쌓여갔고 이내 글쓰기에도 영향이 갔다. 하루에 정해놓은 최소 분량마저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자 그마저 고스란히 스트레스가 되었다. 스르륵은 무슨, 이러다간 쓰던 이야기마저 다 못 끝낼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다시 돌아가기로.
뭔가 많이 하는 휴일은 그렇게 돌아왔다. 태블릿PC와 이어폰을 혹사시키며 새삼 창작이 아닌 감상의 기쁨을 실감했다. 그러고 나자 신기하게도 작품을 분석하는 것마저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이야기를 짓고 있다.
좋은 창작자는 동시에 훌륭한 독자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으로 단번에 거장 반열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뷔 이전부터 지독한 시네필이었던 것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서 만들어진 명작들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걸작들을 즐기지 못한 채 그저 작품을 위한 분석 대상으로 여겼고, 슬럼프가 찾아왔던 것이다.
슬럼프에서 벗어난 지 1년, 요즘도 종종 그 노래를 들을 때면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펑펑은 아니고 또르륵, 줄줄은 아니고 찔끔. 하지만 이제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즐기고 감탄할 뿐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느낀 강렬함이 더 좋은 작품을 위한 주춧돌이 되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