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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ge M Apr 13. 2020

[토요 호러가이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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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김혜민

외면받아 숨기고만 있던 취향, 매주 하나씩 <호러 상자>를 열어보자.


“전 호러 좋아해요.” 한 마디로 특이한 사람 취급받은 경험이 있는가? 나는 <토요호러가이드>를 연재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혼자 방구석에서 불을 다 꺼 둔 채 히죽대며 호러 영화를 보던 날들이 생각났고 연출이며 내용이 너무 좋아도 차마 남에게 떠들지 못한 말을 꺼낼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좋아하는 장르가 주류도 아닌데 이를 소개하는 글을 써서 월급을 받는다니, 이거야말로 직장에서 하는 자아실현이 아닌가.

호러 영화 얘기를 하는 날이 왜 하필 토요일이냐면, 내일의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무섭고 징그럽고 으스스하고 끔찍하고 잔인하고 찝찝하고 기이한 영화를 보고 잠자리 좀 설치면 어떤가, 내일은 일요일인데.

물론 일요일에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예를 들면 서비스, 3교대, ‘에러 났어요’ 5음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개발, 어도비 툴을 2개 이상 사용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에겐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토요호러가이드>의 첫 번째 영화는 컬트의 원조라고 불리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빼놓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고 ‘스파이더맨’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인지 감이 오셨는지? 아직 짐작이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더 설명하자면, 이 영화에는 항상 ‘저예산’이란 수식어가 따라붙고 동네 극장 주인에게 투자를 받아 제작한 영화다.


숲속에 뭔가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에 줄을 달아 끌고 다니고 연기가 피어나는 걸 표현하기 위해 스텝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웠다는 영화, 그리고 놀랍게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

될성부른 샘 레이미의 떡잎. '이블데드(1981)'다.


▲영화 '이블데드'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애쉬(브루스 캠벨)친구들과 외딴 지역에 있는 오두막에 놀러 가 우연히 ‘죽음의 책’과 관련 연구 자료를 찾고, 저주로 되살아난 악령은 애쉬 친구들의 몸에 깃든다.

무려 39년 전 영화에 저예산이다. 영화의 끝에는 점토로 만든 스톱모션이 등장할 정도로 특수효과는 조잡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5K 시대에 구할 수 있는 최고화질이 720p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블데드는 호러 장르에서 굳건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잘 만든 호러가 넘치는 지금, 이런 아마추어의 영화가 왜 특별한가 묻는다면 그만큼 샘 레이미의 역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될성부른 떡잎의 자아실현, 이블데드는 아마추어가 만든 영화라서 더 빛이 난다.
 
이블데드는 단순한 저예산 오컬트 호러 영화가 아니다. 흔해 빠진 B급 호러로 분류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블데드 전에도 좀비, 오컬트, 호러, 스릴러 영화는 존재했다.

이블데드의 러닝타임은 85분이다. 긴장감이 무기인 영화의 러닝타임은 절대로 100분을 넘겨선 안 된다.

여기서 샘 레이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이블데드는 죽음의 책이 등장한 이후 영화 내에서 어떤 틈도 주지 않는다. 정신없이 바뀌는 카메라 앵글, 긴장감 고조를 위해 적재적소에 사용한 음향이 관객을 긴장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또 상황을 정돈하거나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괜한 설명을 집어넣는 짓도 하지 않는다. 빠르게 보여주고 빠르게 끝낸다. 스릴러 영화의 텐션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기가 막히게 다뤄냈다.

샘 레이미는 지독한 영화광이었을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 웨스 크레이븐, 조지 로메로의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보며 언젠가 자신도 메가폰을 잡고 싶다는 꿈을 키웠으리라.
 
실제로 영화 내에서 보이는 과도한 홍채 클로즈업, 귀를 괴롭히는 음향, 잡다한 소품들을 보면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을 오마주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블데드는 샘 레이미가 좋아하는 감독들에게 바치는 선물인 동시에 이후 제작될 호러 영화들의 본보기다.

다른 이가 쓴 이블데드에 관한 소감 중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블데드를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공포영화도 좋아한다고 보이는 건 원치 않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왜‘ 좋아하는지를 찾아내 줬으면 했다.'(취향의 탄생, 톰 밴더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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