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만큼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만날수 있다.
이들의 일은 어떤지 궁금했다. 여러 여성 직업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일을 소개한다.
유튜브에서 개인 채널과 영상 편집 강의가 범람하고 모두가 쉽게 영상에 손을 대는 시대다. 장벽이 낮아진 만큼 영상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확연히 눈에 띄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은아 씨는 23살, 4년 차 영상 제작자다. 나를 만나자마자 “아, 기자님 안녕하세요!”하고 악수를 청한 은아 씨를 보자 단박에 (내게는 없는) 활기와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인터뷰는 무척 수월하게 진행했다. 먼저 은아 씨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나은아입니다. 4년 전부터 치열하게 일하다가 3월에 퇴사해서, 지금은 쉬고 있어요.”
나는 진짜 쉬고 있냐고 물었다. “외주도 일이잖아요”라고 하자 은아 씨는 “맞아요, 그냥 회사를 나왔지, 일은 항상 하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요즘 외주 단가는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유튜브 편집은 ‘편당 5만원’이란 말도 안되는 가격을 부르는 일도 허다하다. 현업에 종사하는 은아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영상 제작에 접근하기 쉬운 시대잖아요. 얼핏 봤을 때 굉장히 간단한 일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사실 기획부터 편집까지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수정사항을 반영해야 해요. 모든 일이 수작업이고요. 저는 영상을 만드는 일을 좋아하지만, 단가가 낮은 일은 거절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영상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단가를 유지하는 건 현업자가 해야할 일이죠.”
은아 씨 얘기가 맞다. 만들어진 영상을 보면 참 쉬워 보인다. 매끄러운 카메라 워킹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컷 전환도, 1초도 비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아이콘들까지, 뭐,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아주 잠깐, 영상 일을 했다. 한 번이라도 영상에 손을 대 본 사람은 안다. 눈에 거슬리는 효과나 비는 시간 없이 계속 영상을 굴러가게 하려면 정말 ‘더럽게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당시 같은 직종에 근무하던 사람은 영상편집 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21세기 삯바느질’. 은아 씨는 이 표현을 듣고 몹시 즐거워했다. “진짜 딱 맞는 표현이에요. 정말 손 많이 가잖아요.”
손은 많이 가는데, 단가는 낮아지고, 갈수록 일을 쉽게 보는 사람이 많아지는 업종. 게다가 은아 씨는 학생 때부터 영상 업계에 종사했다. 어리단 이유로 무시도 많이 당했을 텐데 계속 영상 일을 하는 이유가 뭔지, 언제 보람을 느끼는지 물었다.
“입금되는 날이죠!” 은아 씨의 말에 나는 '돈 들어오는 날보다 보람찬 날이 없죠'라고 대답했다. 은아 씨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완성본이 나왔는데 클라이언트나 같이 프로젝트를 한 작업자가 ‘너무 좋아요!’라고 할 때요. 아니면 누군가 제 영상을 보고 재밌다고 할 때 정말 뿌듯합니다.”
나도 인터뷰이에게 기사를 보여주고 “너무 좋아요!”란 말을 들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국장님껜 죄송한 얘기지만 다른 무엇보다 인터뷰를 진행할 때 가장 의욕이 생긴다. 누군가 어떤 기사를 썼냐고 물으면 꼭 얘기하는 게 인터뷰 코너다. 은아 씨는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자랑하고 싶은 작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 진짜 많은데, 하나만 고르라면 회사 다니면서 했던 보건복지부 주최 ‘대화가 ㅍㅇ해’ 피임 토크콘서트요. 함께 프로젝트를 한 팀원이 전부 좋았고 다들 잘 하는 분들이라 저도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4개월짜리 장기 프로젝트였는데 행사 마지막 날, 패널이었던 재재, 제아 씨가 영상이 너무 재밌다고 칭찬해 주셨죠. 그때 영상은 개인 소장하고 있어요. 자존감을 높이는 용도로요.”
나는 은아 씨에게 촬영, 편집보다 모션 그래픽 일을 더 좋아하냐고 물었다. 은아 씨는 전부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포스트 프로덕션(영상 후반 작업 담당 업체)에서 일할 땐, 정해진 템플릿이 있어서 모션 그래픽의 매력을 잘 몰랐어요. 편집 일을 제일 좋아했죠. 그러다가 모션 그래픽에 푹 빠지게 된 거예요. 좋은 촬영본에 좋은 모션이 들어가면 영상이 정말 멋있거든요. 대미를 장식하는 느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작업이라 매력적이에요. 아, 물론 전 촬영이랑 편집도 할 수 있어요! 이 인터뷰를 읽는 클라이언트 분들, 저 촬영·편집·모션 다 합니다!”
혼자서 영상을 다 만들 수 있다는 뜻이냐고 묻자 은아 씨는 “맞는 말이지만 아니기도 해요”라며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클라이언트가 있고 기획자가 따로인 경우도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의견을 맞추는 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은아 씨는 “힘들어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단가에 안 맞는 경우가 너무 많고, 저 자신과 타협해야 할 때도 많아요”하고 대답했다.
“클라이언트나 기획자는 정말 엄청난 작업물을 레퍼런스로 가져와요. 하지만 그걸 ‘똑같이’ 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 레퍼런스의 ‘어떤 점’에 꽂혀서 가져온 거거든요. 그래서 ‘이 레퍼런스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신 건가요?’ 혹은 ‘이러저러한 느낌을 원하시는 건가요?’하고 얘기하다 보면 타협점이 나와요. 저는 클라이언트나 기획자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업자잖아요.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하죠.”
그럼 업무 외적으로는 어떤 고충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은아 씨는 “일을 하다가 '아, 진짜 영상 같은 거 때려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요. 어차피 이 일을 계속할 텐데.. 그럴 땐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일에 집중해요. 저는 영상 일을 좋아하니까요.”
왜 그렇게 영상 일이 좋은지, 어쩌다 영상을 하게 됐는지 함께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알아보다가 영상 학과가 있는 곳에 합격했어요. 3년 동안은 그냥 영상이 재밌어서 했죠. 촬영, 편집, 녹음 안 가리고 다 했어요. 그러다 대학 진학 때 영상은 이제 그만해야지, 싶어 평소 꿈꾸던 광고 기획과를 갔어요. 결과적으론 광고 대행사에 다니는 영상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은아 씨는 웃었다. “제가 잘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계속 영상 업계에 머물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이 일을 좋아하게 됐어요.”
밤샘 많고, 수정 잦고, 창의력도 필요하고 클라이언트는 물론 팀원과도 합이 맞아야 하는 일이다. 체력도, 감정 소모도 많은데, 영상 업계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냐고 물었다.
“노가다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종종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강의 영상을 보고 ‘이거 꼭 이렇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결실도 없어요.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모션은 정말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에요.”
어린 나이에 자기 일에 대한 확신과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게 신기했다. 은아 씨에게 앞으로의 비전을 물었다.
"정말 많이 듣는 얘기 중에 하나가 '너 시니어 되면 회사 차려야지'예요.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전 영상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고 싶어요. 저는 일하면서 좋은 선배가 정말 절실했거든요. 나중에 영상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업계 선배이고 싶습니다."
은아 씨는 사뭇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게 몇 가지 작업물을 보여줬는데, 확실히 일을 사랑하는 만큼 책임감이 있는 게 느껴졌다. "진짜 잘하시네요" (지난 번 인터뷰에서도 같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역시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라고 얘기하자 은아 씨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열정과 재능을 가진 사람의 결과물을 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잘 만들었다'는 이유로 끝까지 시청하게 되는 광고가 있는 만큼, 영상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열정을 잃지 않도록 업계 처우 또한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정당한 댓가가 있어야 결과물 역시 훌륭하기 마련이니까.
혹자는 가격을 들으면 '그렇게 비싸요?' 라고 되묻겠지만, 영상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인터뷰 다섯 번 중 세 번이 디자이너다. 부디 예술을 업으로 삼은 모두가 정당한 댓가를 받고 좋은 결과물을 내, 클라이언트와 작업자 모두가 만족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로 자리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창작으로 돈을 벌어 본인의 재능을 직업으로 삼을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