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ge M Jul 30. 2020

[문예종] 연극 <로테/운수> - 운수

창작집단 하이카라 / 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문화예술종합가이드,
당신과 나누고 싶은 경험을 담은 글

원문보기

바이라인 김혜민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려보자. 나는 그 당시에도 김첨지가 아내를 깊이 사랑했다는 해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라질 년’이란 말을 쓰며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때는 다 그랬다’는 말로 무마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소설이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모험가가 아니라 인디언 학살자라고 평가되는 즘, 문학 역시 시대가 바뀌면 재평가가 필요하다.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묘사한 소설이 '운수 좋은 날' 하나인 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운수 좋은 날’은 버젓이 교과서에 실려있고 김첨지는 츤데레(겉으로는 매정하게 굴지만 속내는 깊은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의 대명사로 통한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죽여 정당방위로 인정된 판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고의성이 있는 살인이 된다. 하지만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였을 때 죄목이 ‘상해치사’인 판례는 여럿이다.

운수는 도예가다. 설렁탕 뚝배기로 남편의 머리를 10여 차례 가격해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기소됐다. 변호사는 운수가 심신미약이 있고 10년 이상 이어진 가정폭력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법정에 선 운수 <사진=창작집단 하이카라>


하지만 검사는 “수입도 있는데 왜 다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운수는 그 ‘다른 방법’이 뭔지 되묻는다. 검사는 “이혼도 있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하고 대답한다.

운수는 “경찰에 신고해도 똑같던데요. 한 번은 그 사람이 먼저 절 때렸다고 신고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냥 가더라고요. 부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요”하고 말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운수 옆에는 내면인 운이 있다. 끊임없이 운수를 향해 “말을 해, 말을!”, “이 오라질 년아!”하고 소리를 지르는 운은 계속해서 남편의 말을 되풀이한다.

한때 남편이 자기를 정말 사랑한다고 믿었던 운수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남편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허망한 목소리로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정말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네가 날 버릴까 봐 그랬어. 사랑해.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을 들은 순간이다.

운수 역을 맡은 배우 김태은 씨는 “처음에는 운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집이 개방적이라 가부장제에 순응하고 사는 여자를 연기하기가 힘들었어요. 이런 역할을 해본 적도 없고요. 이혼하면 되지, 맞서면 되지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드러내지 않을 뿐 이런 경우가 제 주변에도 있더라고요.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면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는 걸 이 극을 진행하면서 알게 됐어요.”

운이 계속 외치는 “말을 해, 이년아, 말을!”이란 대사는 완전히 가해자의 언어다. 살인죄로 기소돼 법정에 서 있고 생소한 용어가 오가는 자리에서 운수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가해자의 언어로 운수를 압박한다.

김태은 씨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본인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고 했다. 서승연 씨는 그러기 위해선 사회 전반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여전히 공권력이 가정 혹은 남녀 사이라는 사적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죠. 관련 제도도 없고 사람들도 가정폭력은 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일, 내놓기 껄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피해자를 보호할 안전망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게 아직도 너무 부족합니다.”

운이 사라지는 건 운수가 판결을 들은 직후다.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네”라는 대사와 함께 극은 끝난다. 운수가 온전히 자유가 되는 순간이다.
              

▲끊임없이 운수를 압박한 가해자의 언어 <사진=창작집단 하이카라>


안다. 이런 얘기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하다는 걸. 하지만 덮는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모른 척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주는 사람이 말하는 사랑이 받는 사람에게도 사랑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한다는 말에 대답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폭력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릴 수 없다는 게 상식인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 세대가 바뀐 만큼 사랑에 대한 고루한 인식도 바뀔 때가 됐다.

<로테/운수>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으나 줄이고 줄였다는 걸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지금도 더 많은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하이카라의 김진선 씨, 서승연 씨, 배우 이혜 씨, 김태은 씨와 이야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참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연극 <로테/운수> - 로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